"순실아 자니? 나 이제 어떡해”
2016년 10월 28일(금) 00:00 가가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은 그 인격도 고매(高邁)할 것이란 생각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환상은 이미 오래전에 깨졌다. 서정주를 비롯해서 적잖은 시인들이, 그 사람의 시와 인격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준 것이다.
성 추문에 연루된 문인 중에는 유명 소설가도 있다. 술자리에서 부적절한 신체 접촉과 성희롱을 했다는 폭로가 나왔다. 이 작가의 이름은 소설 ‘은교’를 쓴 박범신(70)이다. 그는 소설과 현실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동안의 경험을 소설로 옮긴 것일까?
문제가 터지자 작가는 즉각 사과했다. 한데 박범신 씨의 사과문이 눈길을 끈다. “스탕달이 그랬듯 ‘살았고 썼고 사랑하고’ 살았어요. 오래 살아남은 것이 오욕∼ 죄일지도. 누군가 맘 상처받았다면 나이 든 내 죄겠지요. 미안해요∼” 아무리 소설가라지만 사과하면서까지도 멋을 부리는 것인가. 기분이 찜찜하다.
어제는, 어린 습작생들을 농락했던 배 모 시인과 백 모 시인이 절필을 선언하고 사과(謝過) 대열에 합류했다. 가을은 마치 사과의 계절이라도 되는 양 요즘 우리 사회에 사과가 넘쳐 나고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고개를 숙일 것 같지 않던 박근혜 대통령마저 대국민 사과를 했다.
내일은 또 무엇이 터지나
그날, 박 대통령은 침통한 표정으로 1분40초 동안 짧은 회견문을 낭독한 뒤 기자들의 질문도 받지 않은 채 말없이 되돌아나갔다. 사과라는 형식을 취했지만 의혹만 더 키우고 만 회견이었다. 이마저 최태민의 딸 최순실(60) 씨가 어디 숨어서 써 준 것은 아닌지?
자고 나면 입이 쩍 벌어질 뉴스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최 씨가 대통령의 연설문만 수정한 게 아니라 안보·외교·인사까지 손대지 않은 것이 없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러니 최 씨를 보면서 조선 말기 명성황후의 비선 실세였던 무녀(巫女) 출신 진령군(眞靈君)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박 대통령을 언니로 불렀다는 최 씨의 위세가 결코 진령군 못지않았을 것을 생각하면, 여기저기서 ‘국정 농단’이란 말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언덕 ‘농’ 자를 쓰는 ‘농단’(壟斷)은 원래 깎아지른 듯이 높이 솟은 언덕을 말한다. 옛날 한 상인이 높은 곳에 올라 가장 좋은 자리를 살펴 잡았다는 데서 유래해, ‘혼자서 거래를 좌지우지함으로써 이익을 독차지한다’는 뜻을 갖는다. 아줌마를 비하하려는 뜻은 없지만 한낱 아줌마에 불과한 최 씨가 대한민국을 들었다 놨다 한 셈이니 사상 유례없는 국정 농단임은 틀림없겠다.
하지만 이때는 ‘농단’보다는 ‘농락’(籠絡:새장과 고삐, 남을 교묘한 꾀로 휘잡아서 제 마음대로 놀리거나 이용함)이란 말이 더 적절할 듯싶기도 하다. ‘농’(籠)이라는 글자를 보면 대바구니(竹) 안에 용(龍)이 들어 있다. 이는 용을 잡아 바구니에 담는다는 뜻이니 ‘무슨 일을 제 마음대로 한다’는 의미다. 최 씨가 박 대통령(용)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했다면 이거야말로 글자 그대로 ‘농락’일 것이다.
그럼에도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절대 아니라며 그렇게 강하게 고개를 흔들던 이 누구였던가. 배신을 싫어해서 ‘동물의 왕국’을 즐겨 본다던 박 대통령은 실제론 ‘아몰랑 왕국’에 살았음이 분명하다. ‘아몰랑’은 ‘어떤 주장의 근거 제시를 요구받았을 때 막무가내로 뭉개고 잡아떼는 행동’을 뜻하는 신조어이니 이처럼 박 대통령에게 딱 어울리는 단어가 또 어디 있겠나.
‘최순실 게이트’는 거대한 빙산과 같아서 그 크기를 아예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따라서 쇠털처럼 하고많은 의혹을 이 짧은 지면에 열거하는 것은 애초 무리일 것이다. 다만 어느 시인이 최근에 쓴 ‘아몰랑 왕국 이야기’는 지금의 최순실 사태를 한 장의 그림처럼 확연히 보여 준다.
“그 나라는 많은 것이 이상했다. 편전에서 조회를 열면 왕은 말이 안 되는 이상한 말만 했다. 밤이 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궐 담장을 넘어 들어왔다. 사관의 사초는 물론 국가 대소사를 적은 문건이 승지의 손을 거쳐 궁궐 밖으로 나갔다. 수렴청정하는 대비마마는 눈물이 없었다. 백성이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조사를 그만두라며 서릿발 같은 교지를 내렸다. 개성에 자리 잡고 교역하던 백성들을 예고도 없이 불러들여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었고 농민을 향해 물대포를 쏘아 죽였다.”
언니 다 끝났어 그만 내려와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렇게 이어진다. “간신배들은 비리 공장을 후원에 지어 검은돈으로 호의호식했으나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다. 승정원도 의금부도 대비마마에게 달려가 엎드리면 그만이었다. 개돼지에 지나지 않는 백성들은 녹조가 낀 물을 마시고 지진으로 집이 무너지고 홍수로 떠내려가도 상관없었다.”
이제 ‘왕국 이야기’의 마지막 대목을 보자. “무당의 딸 순실대비 마마가 통치한 기간 동안 그 나라는 승냥이와 이리들이 궁궐 안에 득시글거렸고 온통 점괘로 국사가 운영되었으며 백성은 철철 피를 흘리고 궁핍한 목숨을 연명했다. 그 이상한 나라의 국호를 대한민국이라고 부른다.”
아, 먼 옛날이 아닌 바로 ‘동방순실지국’ 얘기였구나. 이거 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박정희 독재 시절 ‘밤의 대통령’이 따로 있단 말은 들었지만, 지금 이 시대에도 ‘낮 대통령’과 ‘밤 대통령’이 따로 있었다니 참으로 기가 찰 일이다.
이제 ‘탄핵’이니 ‘하야’(下野)니 하는 이야기마저 나오고 있는 판국이다. 참담한 심경으로만 말한다면 박 대통령도 국민들과 다르진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트위터를 통해 부지런히 퍼 나르고 있는 어느 만화(만평) 속 대통령의 모습이 처연한데, 몇 마디 대사가 집단 ‘멘붕’(패닉, panic)에 빠진 우리를 ‘웃프게’ 한다. “순실아 자니? 전화 좀 받아…. PC는 왜 버렸어? ㅠㅠ 이제 어뜨케?” 최 씨가 이 그림을 보았다면 뭐라 했을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언니, 다 끝났어. 이젠 그만 내려와" 그럴 린 없겠지만 이게 바로 국민들이 듣고 싶어하는 대답 아닐까.
〈주필〉
문제가 터지자 작가는 즉각 사과했다. 한데 박범신 씨의 사과문이 눈길을 끈다. “스탕달이 그랬듯 ‘살았고 썼고 사랑하고’ 살았어요. 오래 살아남은 것이 오욕∼ 죄일지도. 누군가 맘 상처받았다면 나이 든 내 죄겠지요. 미안해요∼” 아무리 소설가라지만 사과하면서까지도 멋을 부리는 것인가. 기분이 찜찜하다.
그날, 박 대통령은 침통한 표정으로 1분40초 동안 짧은 회견문을 낭독한 뒤 기자들의 질문도 받지 않은 채 말없이 되돌아나갔다. 사과라는 형식을 취했지만 의혹만 더 키우고 만 회견이었다. 이마저 최태민의 딸 최순실(60) 씨가 어디 숨어서 써 준 것은 아닌지?
자고 나면 입이 쩍 벌어질 뉴스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최 씨가 대통령의 연설문만 수정한 게 아니라 안보·외교·인사까지 손대지 않은 것이 없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러니 최 씨를 보면서 조선 말기 명성황후의 비선 실세였던 무녀(巫女) 출신 진령군(眞靈君)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박 대통령을 언니로 불렀다는 최 씨의 위세가 결코 진령군 못지않았을 것을 생각하면, 여기저기서 ‘국정 농단’이란 말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언덕 ‘농’ 자를 쓰는 ‘농단’(壟斷)은 원래 깎아지른 듯이 높이 솟은 언덕을 말한다. 옛날 한 상인이 높은 곳에 올라 가장 좋은 자리를 살펴 잡았다는 데서 유래해, ‘혼자서 거래를 좌지우지함으로써 이익을 독차지한다’는 뜻을 갖는다. 아줌마를 비하하려는 뜻은 없지만 한낱 아줌마에 불과한 최 씨가 대한민국을 들었다 놨다 한 셈이니 사상 유례없는 국정 농단임은 틀림없겠다.
하지만 이때는 ‘농단’보다는 ‘농락’(籠絡:새장과 고삐, 남을 교묘한 꾀로 휘잡아서 제 마음대로 놀리거나 이용함)이란 말이 더 적절할 듯싶기도 하다. ‘농’(籠)이라는 글자를 보면 대바구니(竹) 안에 용(龍)이 들어 있다. 이는 용을 잡아 바구니에 담는다는 뜻이니 ‘무슨 일을 제 마음대로 한다’는 의미다. 최 씨가 박 대통령(용)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했다면 이거야말로 글자 그대로 ‘농락’일 것이다.
그럼에도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절대 아니라며 그렇게 강하게 고개를 흔들던 이 누구였던가. 배신을 싫어해서 ‘동물의 왕국’을 즐겨 본다던 박 대통령은 실제론 ‘아몰랑 왕국’에 살았음이 분명하다. ‘아몰랑’은 ‘어떤 주장의 근거 제시를 요구받았을 때 막무가내로 뭉개고 잡아떼는 행동’을 뜻하는 신조어이니 이처럼 박 대통령에게 딱 어울리는 단어가 또 어디 있겠나.
‘최순실 게이트’는 거대한 빙산과 같아서 그 크기를 아예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따라서 쇠털처럼 하고많은 의혹을 이 짧은 지면에 열거하는 것은 애초 무리일 것이다. 다만 어느 시인이 최근에 쓴 ‘아몰랑 왕국 이야기’는 지금의 최순실 사태를 한 장의 그림처럼 확연히 보여 준다.
“그 나라는 많은 것이 이상했다. 편전에서 조회를 열면 왕은 말이 안 되는 이상한 말만 했다. 밤이 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궐 담장을 넘어 들어왔다. 사관의 사초는 물론 국가 대소사를 적은 문건이 승지의 손을 거쳐 궁궐 밖으로 나갔다. 수렴청정하는 대비마마는 눈물이 없었다. 백성이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조사를 그만두라며 서릿발 같은 교지를 내렸다. 개성에 자리 잡고 교역하던 백성들을 예고도 없이 불러들여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었고 농민을 향해 물대포를 쏘아 죽였다.”
언니 다 끝났어 그만 내려와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렇게 이어진다. “간신배들은 비리 공장을 후원에 지어 검은돈으로 호의호식했으나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다. 승정원도 의금부도 대비마마에게 달려가 엎드리면 그만이었다. 개돼지에 지나지 않는 백성들은 녹조가 낀 물을 마시고 지진으로 집이 무너지고 홍수로 떠내려가도 상관없었다.”
이제 ‘왕국 이야기’의 마지막 대목을 보자. “무당의 딸 순실대비 마마가 통치한 기간 동안 그 나라는 승냥이와 이리들이 궁궐 안에 득시글거렸고 온통 점괘로 국사가 운영되었으며 백성은 철철 피를 흘리고 궁핍한 목숨을 연명했다. 그 이상한 나라의 국호를 대한민국이라고 부른다.”
아, 먼 옛날이 아닌 바로 ‘동방순실지국’ 얘기였구나. 이거 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박정희 독재 시절 ‘밤의 대통령’이 따로 있단 말은 들었지만, 지금 이 시대에도 ‘낮 대통령’과 ‘밤 대통령’이 따로 있었다니 참으로 기가 찰 일이다.
이제 ‘탄핵’이니 ‘하야’(下野)니 하는 이야기마저 나오고 있는 판국이다. 참담한 심경으로만 말한다면 박 대통령도 국민들과 다르진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트위터를 통해 부지런히 퍼 나르고 있는 어느 만화(만평) 속 대통령의 모습이 처연한데, 몇 마디 대사가 집단 ‘멘붕’(패닉, panic)에 빠진 우리를 ‘웃프게’ 한다. “순실아 자니? 전화 좀 받아…. PC는 왜 버렸어? ㅠㅠ 이제 어뜨케?” 최 씨가 이 그림을 보았다면 뭐라 했을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언니, 다 끝났어. 이젠 그만 내려와" 그럴 린 없겠지만 이게 바로 국민들이 듣고 싶어하는 대답 아닐까.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