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밝힌노래]<10>청년 백범, 충무공 유적지 답사하며 ‘애국’을 노래하다
2016년 10월 17일(월) 00:00
스물한 살 때 일본군 맨손으로 처단후 감옥 생활
탈옥 뒤 광주·목포·완도·해남 등 삼남지방 잠행
보성 쇠실마을 김광언 집에 머물며 역사 교육
애국가 악보 해외 배포 앞장 … 임시정부도 불러
백범 김구와 체 게바라는 닮았다. 조국과 민중을 사랑했고, 독립과 혁명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그들은 23살 청년시절 여행을 떠났다. 백범은 삼남(충청·전라·경상)지방으로, 게바라는 라틴아메리카로. 그들은 여행에서 황홀한 자연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유적을 통해 역사를 보았고, 고달픈 민중의 현실을 느꼈다. 세계관이 바뀌었고, 분석이 깊어졌으며, 정신은 풍성해졌다. 그리고 삶이 바뀌었다. 혁명의 삶으로.



◇23살 여행이 그를 바꿨다

올해는 백범 탄생 140돌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나고 자란 백범이지만, 전라도에도 발자취를 남겼다. 청년시절 전라도 잠행은 이후 진로를 결정하는 밑바탕됐다. 청년 백범은 왜 멀고 먼 전라도까지 왔을까? 숨기 위함이었고, 충무공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백범은 18세의 나이에 동학접주가 돼 동학농민전쟁을 치렀다. 21세(1896년)에 황해도 치하포에서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로 일본군 중위 쓰치다 조스케를 처단했다. 석달 뒤 체포돼 인천감리서에 투옥됐다가 1898년 탈옥, 삼남지방으로 숨어든다. 그때 나이 23세다.

‘백범일지’에 나오는 백범의 전라도 잠행은 ‘광주→함평→목포→해남→강진→완도→보성→화순→담양→곡성’으로 이어졌다. 백범은 완도 고금도의 이충무공유적지에서 선열들의 ‘애국’을 가슴에 새겼고, 해남 녹우당·강진 다산초당·보성 쇠실마을에서는 교육을 통해 ‘애민’을 되새겼다. 백범은 “고금도의 충무공 전적지, 금산의 칠백의총, 공주의 승장 영규의 비 등을 보면서 많은 느낌을 받았다”고 적었다. 아마도 그 뒤 50여년간 변함없는 백범의 민족자주노선은 이때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청년 백범이 쇠실마을을 찾은 때는 1898년 음력 5월이었다. ‘김두호’라는 이름으로 숨어들었다. 쇠실마을은 안동 김씨 집성촌으로, 금곡·심송이라 불리는 깊은 골짜기다. 보성사람들조차 마을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하고, 그 덕에 6·25 때도 피해를 입지 않았단다. 은신하기 딱 좋은 곳이다. 앞은 트여 한 눈에 내려다보이고, 뒤는 골이 깊어 숨기에 딱이다.

탈옥 후 두달여 잠행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있던 백범은 이 곳에서 오랜만에 편히 쉬며 힘을 축적했다. 김광언 댁에서 40여일 동안 은거하며 동네사람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독립의식을 고취하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백범은 떠날 때에야 ‘내가 일본사람을 죽이고 피해 다닌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죽지 않으면 연락을 하겠다’며 ‘이별시’(離別難)를 남겼다.

“이별하기란 어렵구나 참으로 이별은 어려운 일인데 / 이별한 곳에서 일가의 정이 솟구쳐 / 꽃나무 한가지를 꺾어 절반씩을 나눠 / 한가지는 종가댁에 남겨두고 한가지는 가지고 떠납니다 / 넓은 천지에 살아서 또 만날 것인지 / 이 강산을 버리고 떠나기도 또한 어려운 일인데 / 네사람이 함께 한달여동안 한가로이 놀고 지내다 / 이별을 아쉬워하며 더없이 떠납니다 / 먼 훗날 이 것을 보시게 되면 혹시 오늘의 나를 회상할까 생각되어 / 정표로 남겨두고 멀리멀리 떠나갑니다”

그 후 48년이 지난 1946년 가을, 백범은 다시 이 곳을 찾아 옛날을 회상하며 은혜에 보답했다. 후손들은 그때의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백범이 건네준 역사책과 글을 보존하고 있다. 은거의 집 바로 앞 논을 메워 백범기념관도 건립했다.

쇠실마을에서 만난 김경회(80)씨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백범선생을 마을에서 뵈었다고 회상했다. 김씨는 “선생을 맞고자 집집마다 형편되는 대로 쌀 한되·반되를 걷어 음식을 장만했는데, 선생은 드시지 않고 수행원들과 마을사람들이 나눠 먹었다. 선생은 곧바로 숨어지내셨던 김광언 댁으로 올라 그 곳에서 개다리소반에 막걸리 한 잔 마시고 떠나셨다. 어른들로부터 ‘참 소탈하셨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백범의 ‘애민’은 광주 백화마을에서 절정에 이른다. 백화마을은 ‘전재민촌(전쟁의 재난을 당한 백성들)’으로, 백범의 정치자금에 의해 만들어졌다. 1946년 9월 백범은 광주를 비롯한 여수·순천·보성·함평 등을 여행한다. 백범의 발이 닿는 곳마다 환영회가 열렸고, 호남인들은 정치후원금품을 앞다퉈 내놓았다. 백범은 이 후원금품을 서민호 당시 광주시장에게 건네며 전재민촌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해 건설됐다. 70년이 지난 현재 이 마을은 재개발 열풍과 함께 사라졌고, 그 자리엔 백범기념관이 세워져 백범을 만날 수 있다.

◇매일 아침 애국가를 부른 백범

백범은 태극기와 애국가를 사랑했다. 임시정부의 수장인 까닭이었다. 임시정부는 매일 아침 조회를 했는데, 그때 국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합창하고서야 업무를 시작했다고 한다. 애국가를 통해 결속을 강화한 것이다.

‘애국가’ 제정은 1896년 9월22일 독립협회가 처음 제안했다. 1902년 고종 황제의 명에 의해 ‘대한제국애국가’가 만들어졌고, 민간에서도 여러종류의 노랫말로 된 애국가가 불려오다 1907년을 전후로 현재의 애국가 노랫말이 만들어졌고,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 곡에 맞춰 부르게 됐다. 그러다가 애국가에 남의 나라 곡을 붙여 부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안익태가 1936년 현재의 애국가를 작곡했다.

작사자는 아직까지도 ‘미상’이다. ‘윤치호설’과 ‘안창호설’이 첨예하게 맞서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백범은 “우리가 3·1운동을 무엇으로 했는가. 태극기·선언서·애국가로 했는데 그 작사자가 왜 문제인가”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백범은 애국가 배포에 힘썼다. 1945년 10월18일 중국 중칭(中京)에서 발행된 백범 김구의 장서인과 친필이 적힌 ‘한중영문중국판 한국애국가(韓中英文中國版韓國愛國歌) 악보’가 이를 말해준다. 이 악보집에는 김구 주석의 사진과 함께 애국가의 창작 과정과 번역자를 소개했다. 안에는 애국가 악보와 함께 한국어, 중국어, 영어 순서대로 가사가 배열돼 있다.

이후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 기념식에서 애국가를 불러 국가로 공식 인정됐다.

/보성·함평=박정욱기자 jwpark@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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