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이영숙] 결혼 2년만에 아들·남편 하늘나라로 … 짧은 행복은 긴 슬픔을 낳고
2016년 06월 30일(목) 00:00

결혼한 지 2년만에 첫 남편과 사별한 이영숙씨는 5년 후 운명처럼 한 남자를 만나 딸 리나를 낳았다. 재혼한 남편과의 행복한 모습.

해방 후 한국사회는 질서를 찾지 못한 채 어리둥절해 있었다. 곧이은 6·25 전쟁은 가난의 누더기를 잔뜩 뒤집어쓴 잿더미의 한반도만 남겼다. 생존의 윤리가 최고의 가치였고, 삶의 공포에 짓눌려 절규했다. 그 시대를 거쳐온 이들은 폭격과 기아를 견디며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목격했다. 죽음에서 삶을 인지했고, 공포의 프리즘을 통해 현실을 보았다.

1947년, 순천에서 태어난 파독 간호사 이영숙(69세). 그가 견디던 시절도 혼미했다. 해방 후 이념의 혼돈과 방치된 생존문제가 고단했다. 순천 매산학교 1회 졸업생인 아버지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가난은 지식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었다.

6형제의 장녀였던 그녀가 선택한 것은 빨리 돈을 버는 일이었다. 당시 일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정부에서 뽑는 간호사 시험이 있었다. 간호사의 꿈을 품고 우석의대에 입학했다. 졸업 후 보건소의 결핵요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독일에서 간호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에 지원했고, 1974년 독일 브레멘에서 첫 병동생활을 시작했다. 어린이 병동이었다.

“아버지가 순천여중 교사여서인지, 저도 어렴풋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고 싶었어요. 또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간호사로서 아이들을 치료하는 일이 좋았어요.”

영숙의 병동생활은 힘들었지만 행복했다. 향수병은 열정으로 육화되었고, 이국땅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부추김이 성실을 채근했다. 병동생활을 하며, 틈틈이 독일어를 공부했다. 눈치가 빠르고 꼼꼼한 탓에 병원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독일 온 지 2년이 되던 어느 날, 아는 동생의 소개로 파독광부 박 씨를 알게 되었다. 박씨는 3년 계약으로 남부 독일 루르 광산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계약이 끝나갈 무렵에 재계약이 성사되었다고 했다. 독일어를 빨리 터득한 박씨를 광산에서 눈여겨보고 회사 내 통역을 맡겼고, 결국 독일에서 머무를 수가 있었다.

그들은 한눈에 사랑에 빠졌다. 스위스 융프라우에 가서 영화 같은 약혼식을 치르고 교회에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결혼식을 올렸다. 곧바로 아이를 가진 영숙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 하지만 짧은 행복은 긴 슬픔을 만나기 위한 통로였을까?

77년 5월, 첫 아이가 태어난 지 6개월이 되던 때였다. 남편 고향 형의 부부가 영숙의 아이를 돌봐주던 때였다. 형의 부부가 잠깐 차에 아이를 놔둔 사이 아기가 차 안에서 질식사한 것이다. 잔인한 이별 앞에서 영숙의 가슴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신앙이 있었던 그였지만, 숨 막히는 고통이 밀려왔다. 그 슬픔은 이국생활에서 느끼는 감정의 동요가 아니었다. 실제 삶의 현장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았을 때 느끼는 처절한 회한이었다.

“그때는 정말 죽을 것처럼 아팠어요. 하지만 곧바로 하나님은 둘째를 허락하셨답니다. 슬픔을 가라앉을 새도 없이 입덧으로 힘들었어요. 인생은 참…….”

하지만 그때까지도 더 큰 고통의 파고가 밀려들지 예감하지 못했다. 다음해인 78년, 남편이 맹장인 줄 알고 응급실로 실려갔는데 대장암 말기였다. 그때 영숙은 임신 9개월째였다. 만삭상태에서 일을 하고, 일이 끝나면 병원에 누워 있는 남편을 보기 위해 에센이라는 도시까지 갔다. 혼자서 아이를 낳았고, 산후조리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들을 보고싶어하는 남편을 위해 핏덩어리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다. 생의 종착역에 다다른 남편은 자신의 분신인 아들을 보고 꺼이꺼이 울었다. 남편은 마지막으로 아들의 얼굴을 만졌고, 영숙은 산후 부기가 빠지지 않아 퉁퉁 부은 몸으로 남편의 마지막을 날을 새며 함께 했다. 남편 박씨는 5월,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남편 나이 겨우 33살이었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눈물로 지샌 밤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어요. 아버지의 얼굴도 알지 못하는 벤자민이 너무 불쌍해서……. 그때마다 신앙으로 견뎠어요.”

영숙은 자주 외로웠다. 젊은 나이에 혼자인 그녀를 보는 시선도 힘들었다. 심지어 주변에서 아이를 달라고 하기도 했다. 미래도 없고 어둑한 젊음만이 그림자처럼 가로막았다. 당시 병원에 근무해야 하는 관계로 벤자민을 독일가정에 맡길 때였다. 주중에는 일하고 주말에 아이를 데리러 가는데 어느 날인가는 평일에 아이가 너무 보고싶었다고 한다.

“꽤 먼거리여서 기차를 타고 아이가 사는 집으로 갔는데 집에 아이만 있고 어른이 없는 거예요. 잠깐 나갔다고 하는데 겁이 덜컥 났어요. 둘째도 잃게 될까봐.”

결국 영숙은 결심을 하고, 벤자민을 데리고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있는 친정집에 맡겨 놓았다. 이후 첫 남편을 잃은 지 5년 후 1983년, 두 번째 남편을 만났다. 그도 박씨였다. 당시 미혼이었던 남편은 영숙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실 영숙은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이 그게 무슨 흠이냐고 하면서 한국에 날 데리고 가서 시댁에 인사시켰어요. 오히려 시부모님은 개의치 않다고 하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결혼을 하고 친정집에서 키우던 벤자민도 다시 데려왔다. 벤자민은 엄마를 보자 다 큰 아이처럼 만면에 미소를 띄었다.

“벤자민이 그러는 거예요. ‘엄마가 날 버리지 않아서 고마워.’라고. 그때 아이를 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재혼한 남편은 아들 벤자민을 자기 호적에 올렸고, 얼마 후 벤자민이 원하는 예쁜 여동생 리나를 낳았다. 딸 리나와 죽은 첫 아들이 태어난 날은 12월 18일 같은 날이다. 누군가가 영숙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생각을 그때 했다. 우연스럽게도 첫째와 둘째 남편은 모두 박씨여서 벤자민과 리나는 더 가까운 형제처럼 느껴졌다.

영숙은 딸 자랑에 얼굴이 해사해진다. 딸 리나의 직업은 복원사이자 고고학자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던 리나는 박물관의 전시물을 원상 그대로 복원하는, 이 분야에서 손꼽히는 유망주다. 영국 대영박물관과 미국 필라델피아 박물관에서도 일을 했다. 영숙은, ‘딸이 뉴욕에서도 일했는데 2001년 쌍둥이 빌딩 폭파 전에 돌아와서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모른다’고 토로했다.

고통은 기한이 있다. 비극적인 엔딩은 이제 그녀 인생에 없다. 그동안 시간이란 마술이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었는지 모른다. 아니, 그녀 안에 내재된 삶을 인내하는 특별한 비결이 있을지 모른다.

/박경란 재독 칼럼니스트 kyou723@naver.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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