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 바다에 휴대폰이 빠졌다 나를 증명하려 멘붕에 빠졌다
본인 인증 위해 밤낮없이 진땀 나를 알리는게 이렇게 힘든가
하계대원 떠난 세종기지에서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행복한 월동 디자인의 힌트
2015년 03월 23일(월) 00:00

남극 세종과학기지 28차 월동대원들이 연구 활동 등 맡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배를 타고 남극해로 나가고 있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는 남극 세종기지는 눈이 내리고 밤이 길어진다.

지난 2월 12일 실험하기 위해 부두에 나가 바닷물을 뜨다 휴대폰을 빠뜨렸다. 밀물 때였다. 수심을 알 수 없는 바다에 들어가 휴대폰을 건져낼 방도가 없었다. ‘방도가 없었다’ 라고 썼지만 휴대폰이 사라진 것에 대해 내심 즐거워했었다. 연락을 하는 것에도 받는 것에도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늦게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같은 활자를 어딘가에 입력해야 할 땐 한숨만 나온다. 한 몸 챙겨 잠들기도 버거운데 졸린 눈으로 콘센트 더듬어 충전해 주어야 하는 기기가 너무 많다. 충전까지만 해도 된다면 양반이다. 업데이트를 해주지 않으면 읽어야 될 것을 못 읽고 함께 웃을 수 없다.

모른 체 하고 싶은 게 많은 세상이다. 메시지 수신확인이 된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카카오톡을 좋아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내 번호를 알고 있기만 해도 어딘가에 초대되고 차단된다는 것도 싫다. 나가기 싫은 자리에 불려나가는 기분이다. 어딘가의 카카오톡 단체채팅방에서는 나 때문에 계속 어떤 메시지들이 여전히 1을 앞에 달고 있을 것이다.

그 중 하나가 28차 월동대 카카오톡 단체채팅방이다. 사실 월동대원에게는 무전기가 하나씩 보급되어 있다. 하지만 업무연락이나 공지사항 등은 카카오톡으로 공유된다. 세종기지 내에서는 와이파이(WIFI) 이용이 자유롭다. 그리고 월동대원 17명은 고유의 업무를 하고 있다. 아침 조회 후 대원들은 각자의 일터로 흩어진다. 하는 업무에 따라 소음이 심하거나 무전이 안 되는 곳에 있을 수도 있다. 이럴 땐 카카오톡 연락이 더 중립적이고 효율적이기 때문에 카카오톡 단체채팅방이 주 연락채널로 쓰이는 것이다.

휴대폰을 바다에 빠뜨린 이후, 어디어디로 모이라고 할 때에 딴 데 있거나 뜬금없는 데에 출몰했다. 내가 이미 나가고 없는 방에는 전화벨이 자주 울렸다. 내게 할 말이 있는 사람들이 속이 터질 동안 여론도 모르고, 분위기도 모르고 어찌어찌 지냈다.

보다 못한 대원들이 내게 예전에 쓰던 휴대폰을 가져오라고 했다. 앞뒤로 액정이 처참히 깨진 아이폰 4에 카카오톡을 설치해주려고 대원들이 애를 많이 썼다. 카카오톡 본사에 전화를 걸어 인증번호를 메일로 보내달라고 요청도 해보고 미국 휴대폰 번호를 연계해서 인증번호를 받으려는 시도도 해보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줬지만 설치가 안 됐다. 나는 여전히 카카오톡이 없다.

카카오톡 때문이 아니더라도 내가 나인걸 증명하기 위해 휴대폰이 있어야 하는 순간을 몇 번 겪었다. 대부분의 기관에서는 본인인증을 위해 사전에 등록된 휴대폰으로 인증번호를 보내준다. 어느 곳에선 내가 업데이트를 하지 않아서 인증을 해 줄 수 없다고 했고, 어느 곳에선 내가 인증번호를 입력하지 않아 인증을 해 줄 수 없다고 했다. 가족에게 부탁했더니 본인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거절당했다고 했다. 착신전환도 안 되어서 인터넷 공인인증서 재발급도 받지 못했다. 명절에 동생에게 돈도 부칠 수 없었다.

한국과의 시차를 고려하여 계획적으로 한 전화에선 안 된다는, 모른다는, 어쩔 수 없다는 응답이 들려왔다. 내가 나인 걸 믿게 하는 일이 이렇게 힘들다니. 휴대폰을 바다에 빠뜨린 그 날 이후 평온이 올 줄 알았는데 더 많은 것에 대한 강제를 맛보게 되었다. 카카오톡이 없어도 스카이프가 있고 텔레그램이 있다. 남극에서까지 이런 것에 시달리고 싶지가 않았지만 이런 건 남극에서도 피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메신저가 없어도 살 수 있다. 그런데 불편함보다는 증명이라는 부분이 계속 뇌리에 남았다. 어떤 점이 나를 나로 있게 하는 걸까? 사실 남극에 있기 때문에 자기증명이 힘든 게 아니다. 어디에 있든 자기증명이라는 게 과연 온당한 절차인지에 대해 고민해보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동 동안 나를 나로 있게 하는 것들에 대해 보다 집중하고 싶다. 그것이 나의 요철이다.

어떤 사람의 특질은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 있게 하고, 그 사람을 지켜주고, 주위 사람들에게 가끔 그 사람을 그립게 만드는 것이 된다. 손가락에서, 무심히 묶은 머리카락에서, 라면을 먹을 때 스프 먼저 넣는지 면을 먼저 넣는지 에서 그 사람의 취향과 기호가 읽힌다. 감별이 되고 판별이 된다. 디뎌 밟을 지점도 간추려진다.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내 마음 속에 남은 사람의 특질들이 있다. 혼자 있는 시간에 그게 어떤 계기로든 촉발되면 그런 기억이 오븐 속 빵 반죽처럼 풍부하게 부풀어 오른다.

하계대원들이 2월 23일 모두 떠났다. 세종기지에 가을이 찾아오고 있다. 눈이 내리고 밤이 길어진다. 한낮 세종기지는 적요하다. 인구밀도가 확 낮아져서, 눈앞을 지나는 사람을 모른 체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정도이다. 어디에 있든 확연히 눈에 띌 정도로 여백이 많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의 여백이 많아지면 대원들은 원하지 않더라도 서로를 더 오래 들여다 볼 수밖에 없다. 곧 시작될 겨울은 여백의 시간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있게 하는 것들이 거슬릴 수도 있고 맘에 들 수도 있다. 대원들은 그걸 인식하고 있다. 피하지방 만들듯 그 시기에 대비하고 있다.

남극에 너무 오고 싶어서 ‘행복한 남극 월동 디자인’이라는 논문을 썼었다. 무기력함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재밌게 노는 방법들을 제안했었다. 남극에 온지 100일이 되어간다. 빙벽은 내게 아름다움을 주지만 공지사항을 전해주러 2층까지 올라와 문을 두드려 주지는 못한다. 나는 누군가에 의해 지탱되고 있고, 나 역시 누군가를 지탱하고 있을 수 있다.

함께 지내는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 있게 하는 지점을 존중하고 그 사람의 기호를 알아봐 주는 것, 그 사람이 원하는 일을 하게 해주는 것이 행복한 남극 월동 디자인의 큰 힌트 같다.

〈남극 세종과학기지 28차 월동대 생물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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