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80살 광주극장’ ‘베토벤’ … 옛이야기 흐르는 ‘세월의 보물창고’
2015년 01월 07일(수) 00:00 가가
부산으로 겨울 휴가를 간 건 여러가지 이유였다. 따뜻한 날씨와 푸른 바다, 영화. 그리고 삼진어묵이 있었다. 1950년, 영도구 봉래시장 판잣집에서 시작된 삼진어묵은 3대째 성업중이다. 부산 4개 지점 하루 매출만 7500만원에 달하는 명성답게 평일 오후였음에도 영도 본점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베이커리에서 빵을 고르듯, 집게와 쟁반을 들고 고로케 등 60여가지 종류의 어묵을 고르는 재미가 그만이다. 맛은 명불허전. 생각만으로 지금도 침이 고인다. 하루 2000명이 찾는 본점 2층에는 어묵 만들기 체험실과 소박한 전시관도 있다.
국제시장 인근 보수동 헌책방 골목도 찾았다. 책방 골목 역시 1950년,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면서 한 부부가 미군 부대에서 나온 책 등을 판 게 시작이었다. 전성기 때 100여곳이 넘던 책방은 이제 50여곳 남짓이다. 골목은 사진으로 본 것보다 훨씬 소박했다. 하지만 쓰러질 듯 위태롭게 책이 쌓여 있는 각 책방마다 이야기가 있었다. 옛스러운 모습 그대로인 곳도 있고, 젊은 감각이 돋보이는 책방도 눈에 띄었다. 골목 가파른 계단에 그려진 ‘어린왕자’ 이야기를 따라 계단 끝까지 올랐다. 가을이면 보수동 책방 골목축제도 열린다.
두 곳 모두 시간이 머무는 듯, 또 흘러가는 곳이다. 세월의 흔적을 놓치지 않으면서, 요란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며 존재감을 키워가는 공간들이기도 하다. 문득 광주에도 이런 공간, 이런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시리즈는 당초 올해 80년이 된 광주극장을 조명하는 단기물로 기획됐다. 한데 광주의 삼진어묵, 광주의 보수동 책방골목을 들여다보고 광주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이들을 만나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광주를 느릿느릿 걸으며 시간의 보석함을 하나씩 열어보면 괜찮치 않을까.
광주에도 개성 넘치는 인테리어와 새로운 감성, 유쾌한 이야기가 담긴 의미있는 공간들이 새롭게 등장했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젊은 기운도 넘쳐난다. 광주일보 문화부가 지난 한해 지면에 소개했던 내용들이다.
10년 넘게 공을 들인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올 9월이면 정식으로 문을 연다. 전당을 발신지 삼아 광주에 새로운 문화가 퍼져나가길 꿈꾸는 이들이 많다. 패기 넘치는 새로운 감성의 공간과 사람들의 이야기, 광주의 삶과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공간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우러지면 그 꿈에 한발짝은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시간 창고’탐험의 첫 주자로 올해 80살 생일을 맞는 광주극장의 역사를 따라가 본다. 1934년 첫삽을 뜬 광주극장은 1935년 10월 1일 문을 열었다.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한 날이었다. 이 해 광주극장에서는 문예봉이 주연하고 홍난파가 음악을 맡은 ‘춘향전’과 ‘홍길동전’이 상영됐다. 김구 선생의 애국 강연회도 열렸다. 영화 상영 뿐 아니라 연극, 가수 리사이틀, 국극단 공연 등이 쉴새 없이 무대에 올랐다. 광주의 문화용광로였다. 지금은 예술영화전용관으로 운영중이다.
지난해 12월 말 ‘삼거리 극장’의 전계수 감독이 광주를 찾았다. 지난 2007년 제작된 ‘삼거리 극장’은 낡고 오래된 극장에 유령들이 출연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유쾌하게 그린 뮤지컬 영화다. ‘삼거리 극장’은 80년 세월이 담긴 광주극장과 안성맞춤인 영화다. 당시 영화를 찍었던 부산 삼일극장은 촬영 후 바로 문을 닫고 말았다. ‘광주극장 80년’ 프레 행사 격으로 마련된 상영회를 위해 7년만에 다시 광주를 찾은 전감독에게 관객들은 “영화 ‘삼거리극장’은 광주극장에서 정기적으로 상영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록키 호러 픽쳐쇼’가 뉴욕 극장에서 정기적으로 관객을 만나듯.
광주극장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올해 옛 안집을 개조한 ‘메종 드 시네마(영화의 집)’가 문을 연다. 광주극장을 주제로 한 학위 논문도 꾸준히 나온다. 광주극장의 80년 역사를 기록중인 다큐감독도 있다. 광주시립민속박물관도 광주극장과 관련한 책자를 상반기 중 펴낼 예정이다. 광주극장에서 촬영한 영화도 개봉 대기중이다.
1982년 문을 연 클래식 음악감상실 베토벤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었다. 베토벤에 얽힌 추억을 갖고 있던 이들이 십시일반 힘을 보탰고, 베토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는 건 특별한 의식이었다. 광주의 오랜 중국집도 찾아볼 계획이다. 추억이 서려 있는 빵집과 이야기가 있는 골목, 오랜만의 가족 사진을 촬영하던 사진관, 대인시장 터줏대감의 생생한 이야기도 담고 싶다. 익숙한 장소는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 지 궁금해 진다.
마음에 담고 싶은 글들로 가득한, 그래서 아껴 읽게 되는 문학평론가 황현산의‘밤이 선생이다’에 실린 ‘기억과 장소’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저자가 직접 들은 소설가 홍성원의 이야기다.
개항 무렵 강상(江商)들에 관한 소설을 쓰기 위해 충청도 강나루를 답사하던 소설가는 마침내 마지막 강상들과 일하던 사공들을 찾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기대하던 답을 들을 수 없었다. 늙은 사공들은 강에 댐을 쌓고 나루터가 없어지고 나니 거기서 일하던 기억도 사라지고 말았다고, “내가 무엇을 하고 살았던가” 한탄했다고 한다.
이렇듯 사라지고, 잊혀진 공간은 삶과 추억마저 앗아가 버린다.
글 말미에 황씨는 썰물일 때는 죽어 있는 마른풀처럼 보이지만, 밀려 온 바닷물에 다시 적시면 푸른 풀처럼 살아나는 갯바위의 이끼를 언급한다. 그는 칼럼을 쓰던 당시의 ‘서울시 디자인 프로젝트’가 ‘기억의 땅을 백지로 만드는 게 아니라 마른 기억의 이끼를 싱싱한 풀로 일으켜 세우는 밀물이길’ 바랬다.
지면을 통해 만나는 공간, 사람, 풍경들이 광주의 기억을 깨우는 밀물이길 바라며 시리즈를 시작한다. 광주의 눈 밝은 이, 광주를 추억하는 이들의 제보도 기다린다. 함께 광주의 시간 속을 걸어보자. 과거를 지나, 현재를 거쳐, 미래를 꿈꾸는 여정이다.
/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
/사진=최현배기자 choi@kwangju.co.kr
광주에도 개성 넘치는 인테리어와 새로운 감성, 유쾌한 이야기가 담긴 의미있는 공간들이 새롭게 등장했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젊은 기운도 넘쳐난다. 광주일보 문화부가 지난 한해 지면에 소개했던 내용들이다.
10년 넘게 공을 들인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올 9월이면 정식으로 문을 연다. 전당을 발신지 삼아 광주에 새로운 문화가 퍼져나가길 꿈꾸는 이들이 많다. 패기 넘치는 새로운 감성의 공간과 사람들의 이야기, 광주의 삶과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공간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우러지면 그 꿈에 한발짝은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시간 창고’탐험의 첫 주자로 올해 80살 생일을 맞는 광주극장의 역사를 따라가 본다. 1934년 첫삽을 뜬 광주극장은 1935년 10월 1일 문을 열었다.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한 날이었다. 이 해 광주극장에서는 문예봉이 주연하고 홍난파가 음악을 맡은 ‘춘향전’과 ‘홍길동전’이 상영됐다. 김구 선생의 애국 강연회도 열렸다. 영화 상영 뿐 아니라 연극, 가수 리사이틀, 국극단 공연 등이 쉴새 없이 무대에 올랐다. 광주의 문화용광로였다. 지금은 예술영화전용관으로 운영중이다.
지난해 12월 말 ‘삼거리 극장’의 전계수 감독이 광주를 찾았다. 지난 2007년 제작된 ‘삼거리 극장’은 낡고 오래된 극장에 유령들이 출연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유쾌하게 그린 뮤지컬 영화다. ‘삼거리 극장’은 80년 세월이 담긴 광주극장과 안성맞춤인 영화다. 당시 영화를 찍었던 부산 삼일극장은 촬영 후 바로 문을 닫고 말았다. ‘광주극장 80년’ 프레 행사 격으로 마련된 상영회를 위해 7년만에 다시 광주를 찾은 전감독에게 관객들은 “영화 ‘삼거리극장’은 광주극장에서 정기적으로 상영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록키 호러 픽쳐쇼’가 뉴욕 극장에서 정기적으로 관객을 만나듯.
광주극장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올해 옛 안집을 개조한 ‘메종 드 시네마(영화의 집)’가 문을 연다. 광주극장을 주제로 한 학위 논문도 꾸준히 나온다. 광주극장의 80년 역사를 기록중인 다큐감독도 있다. 광주시립민속박물관도 광주극장과 관련한 책자를 상반기 중 펴낼 예정이다. 광주극장에서 촬영한 영화도 개봉 대기중이다.
1982년 문을 연 클래식 음악감상실 베토벤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었다. 베토벤에 얽힌 추억을 갖고 있던 이들이 십시일반 힘을 보탰고, 베토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는 건 특별한 의식이었다. 광주의 오랜 중국집도 찾아볼 계획이다. 추억이 서려 있는 빵집과 이야기가 있는 골목, 오랜만의 가족 사진을 촬영하던 사진관, 대인시장 터줏대감의 생생한 이야기도 담고 싶다. 익숙한 장소는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 지 궁금해 진다.
마음에 담고 싶은 글들로 가득한, 그래서 아껴 읽게 되는 문학평론가 황현산의‘밤이 선생이다’에 실린 ‘기억과 장소’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저자가 직접 들은 소설가 홍성원의 이야기다.
개항 무렵 강상(江商)들에 관한 소설을 쓰기 위해 충청도 강나루를 답사하던 소설가는 마침내 마지막 강상들과 일하던 사공들을 찾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기대하던 답을 들을 수 없었다. 늙은 사공들은 강에 댐을 쌓고 나루터가 없어지고 나니 거기서 일하던 기억도 사라지고 말았다고, “내가 무엇을 하고 살았던가” 한탄했다고 한다.
이렇듯 사라지고, 잊혀진 공간은 삶과 추억마저 앗아가 버린다.
글 말미에 황씨는 썰물일 때는 죽어 있는 마른풀처럼 보이지만, 밀려 온 바닷물에 다시 적시면 푸른 풀처럼 살아나는 갯바위의 이끼를 언급한다. 그는 칼럼을 쓰던 당시의 ‘서울시 디자인 프로젝트’가 ‘기억의 땅을 백지로 만드는 게 아니라 마른 기억의 이끼를 싱싱한 풀로 일으켜 세우는 밀물이길’ 바랬다.
지면을 통해 만나는 공간, 사람, 풍경들이 광주의 기억을 깨우는 밀물이길 바라며 시리즈를 시작한다. 광주의 눈 밝은 이, 광주를 추억하는 이들의 제보도 기다린다. 함께 광주의 시간 속을 걸어보자. 과거를 지나, 현재를 거쳐, 미래를 꿈꾸는 여정이다.
/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
/사진=최현배기자 choi@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