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철의 '오디세이아'] 당신들의 민주주의
2014년 10월 03일(금) 00:00 가가
페르시아 전쟁은 인류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쟁 중의 하나다. 규모면에서 이보다 큰 전쟁이나 시대의 판도를 바꾼 전쟁이야 무수히 많았지만, 페르시아 전쟁의 여진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전쟁의 배경은 복합적이지만, 척박한 토양 탓에 해적질로 살아가던 그리스 민족에 대한 소아시아인들의 적개심이 일차적 원인이었다. 특히 그리스인들이 에게해를 건너 트로이를 멸망시킨 것은 금도를 넘은 일이었다.
이후 소아시아의 지배자가 된 페르시아 황제에게 그리스를 정복하는 일은, 왜구의 소굴이었던 대마도를 정벌하는 것과 같은 숙원 사업이었다. 하지만 페르시아의 그리스 정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규모 해적들을 소탕하기 위해 전면전을 일으키기에는 실익이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리스 해적들이 탄 배가 난파하여 페르시아 연안에 닿았을 때, 어전에 끌려간 포로들이 황제를 분노케 했다. 황제 앞에 무릎을 꿇으라는 명령에 포로들이 ‘우리는 인간 앞에 무릎 꿇지 않는다’고 버틴 것이다.
이 순간 페르시아의 황제는 그리스 정벌을 결심한다. 고레스(키루스) 대왕 이래 관용정책으로 주변국을 대해 온 페르시아지만, 이렇게 무례하고 야만스러운 민족을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페르시아는 정벌을 감행하지만, 해상을 통한 다리우스의 첫 번째 원정은 기상 악화로 실패하고 만다. 그 후 왕위를 이어 받은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아버지의 숙원사업이 되어버린 2차 원정을 준비한다.
관대한 크세르크세스는 군대를 일으키기 전에 그리스인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다. 그는 사신을 보내 ‘흙과 물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스스로 항복하고 앞으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아들이겠다는 상징물을 바치라는 요구였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항복은커녕 페르시아의 젊은 왕을 조롱했다. 페르시아 사신의 목을 베고, ‘모론 라베(와서 가지고 가라)’라고 답한 것이다.
분노가 극에 달한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 전역에서 100만 군대를 징발했다. 불사부대를 앞세운 페르시아의 진군은 위력적이었다. 바다 위에 함선으로 다리를 놓고 산을 깎아 운하를 만들며 진군했다. 부대가 물을 마시면 주변의 우물이 마르고 그들이 지나가면 새로운 길이 생겼다.
세 달에 걸친 진군 끝에 그리스 초입에 당도하자 황제는 진군을 멈추고, 다시한번 사신을 보내 지금이라도 흙과 물을 보내면 용서하겠노라고 통고했다.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다.
이쯤되자 그리스도 당황했다. ‘와서 가지고 가라’고 호기롭게 외치긴 했지만, 이 거친 땅을 정복하기 위해 대규모 정규군을 진짜 동원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다.
의견이 분분했다. 며칠 낮과 밤에 걸친 토론이 이어졌다. 말하고 싶은 사람은 모두 말했다. 그 다음 싸우자는 쪽은 흰 돌을, 항복하자는 쪽은 검은 돌을 바구니에 담기로 했다. 돌을 세어 흰 돌이 더 많이 나오자 검은 돌을 던진 사람들이 전부 결과에 승복했다. 전원 하나가 되어 맞서 싸우기로 결의한 것이다. 그 다음 결과는 모두가 아는대로 그리스군의 극적 승리였다.
페르시아 전쟁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전술 전략이야 군사적 영역이지만 전쟁을 결정하는 과정이 중요했다. 그들은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했던 것이다.
페르시아는 황제의 결정에 따라 100만이 움직였지만 그리스는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스스로 움직였다. 그 순간을 가리켜 ‘인류역사에서 민주주의가 시작된 순간’이라 부른다.
이렇듯 민주주의는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논의하고 합의하고 결정하고 승복하는 것’이 요체다.
그로부터 2500 년이 지났다. 산업이 발전했고 과학은 진보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어떻게 되었는가. 해적질을 일삼던 고대 그리스인들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들의 민주주의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라고.
<지식나눔네트워크 대표>
페르시아 전쟁의 배경은 복합적이지만, 척박한 토양 탓에 해적질로 살아가던 그리스 민족에 대한 소아시아인들의 적개심이 일차적 원인이었다. 특히 그리스인들이 에게해를 건너 트로이를 멸망시킨 것은 금도를 넘은 일이었다.
결국 페르시아는 정벌을 감행하지만, 해상을 통한 다리우스의 첫 번째 원정은 기상 악화로 실패하고 만다. 그 후 왕위를 이어 받은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아버지의 숙원사업이 되어버린 2차 원정을 준비한다.
관대한 크세르크세스는 군대를 일으키기 전에 그리스인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다. 그는 사신을 보내 ‘흙과 물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스스로 항복하고 앞으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아들이겠다는 상징물을 바치라는 요구였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항복은커녕 페르시아의 젊은 왕을 조롱했다. 페르시아 사신의 목을 베고, ‘모론 라베(와서 가지고 가라)’라고 답한 것이다.
분노가 극에 달한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 전역에서 100만 군대를 징발했다. 불사부대를 앞세운 페르시아의 진군은 위력적이었다. 바다 위에 함선으로 다리를 놓고 산을 깎아 운하를 만들며 진군했다. 부대가 물을 마시면 주변의 우물이 마르고 그들이 지나가면 새로운 길이 생겼다.
세 달에 걸친 진군 끝에 그리스 초입에 당도하자 황제는 진군을 멈추고, 다시한번 사신을 보내 지금이라도 흙과 물을 보내면 용서하겠노라고 통고했다.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다.
이쯤되자 그리스도 당황했다. ‘와서 가지고 가라’고 호기롭게 외치긴 했지만, 이 거친 땅을 정복하기 위해 대규모 정규군을 진짜 동원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다.
의견이 분분했다. 며칠 낮과 밤에 걸친 토론이 이어졌다. 말하고 싶은 사람은 모두 말했다. 그 다음 싸우자는 쪽은 흰 돌을, 항복하자는 쪽은 검은 돌을 바구니에 담기로 했다. 돌을 세어 흰 돌이 더 많이 나오자 검은 돌을 던진 사람들이 전부 결과에 승복했다. 전원 하나가 되어 맞서 싸우기로 결의한 것이다. 그 다음 결과는 모두가 아는대로 그리스군의 극적 승리였다.
페르시아 전쟁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전술 전략이야 군사적 영역이지만 전쟁을 결정하는 과정이 중요했다. 그들은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했던 것이다.
페르시아는 황제의 결정에 따라 100만이 움직였지만 그리스는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스스로 움직였다. 그 순간을 가리켜 ‘인류역사에서 민주주의가 시작된 순간’이라 부른다.
이렇듯 민주주의는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논의하고 합의하고 결정하고 승복하는 것’이 요체다.
그로부터 2500 년이 지났다. 산업이 발전했고 과학은 진보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어떻게 되었는가. 해적질을 일삼던 고대 그리스인들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들의 민주주의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라고.
<지식나눔네트워크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