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은 시대의 거울
2014년 08월 01일(금) 00:00 가가
서윤영의 '집과 사람'
지금으로부터 거의 백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급격한 문화변동의 시기였던 1920∼30년대 개화기에 문화주택이 유행했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여서 문화주택 역시 본래는 일본으로부터 유래한 것이었지만, 조선의 중상류 사회에서 빠르게 유행하면서 선망의 주택이 되어갔다.
그런데 주택을 살펴보면 각 방들의 명칭이 서재, 응접실, 침실, 주부실, 아동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 지금과는 조금 다름을 알 수 있다. 5개의 방이 있는 집이라면 지금의 중대형 아파트와 비슷한 규모인데 그 구성은 사뭇 다르다. 그것은 가장의 시각에서 구성된 주택이다.
자신이 낮에 머무르는 서재, 밤에 잠을 자는 침실,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 그리고 아내의 방인 주부실과 자녀들을 위한 아동실로 구성된 것이다. 당시 자녀는 한 집에 대개 서너 명은 되었는데 아동실은 하나일 뿐이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연령과 성별의 구분없이 모두 한 방을 썼다는 말이 된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나마 이것은 과거에 비해 나아진 경우였다. 전근대사회에서 주택은 철저히 남성 가장의 시각에서 계획되었고 여기에 아내를 위한 방을 하나 마련해 주면 족했다.
아동이라는 개념이 대두하기 시작하는 것은 대략 19세기 무렵이고 그 이전까지 아동이란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존재였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방을 별도로 둔다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속했다.
그리고 해방 후 급격한 경제성장의 시기이던 1960년대부터 주택의 모습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다.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라는 가족계획의 구호 아래 부부와 두 자녀로 구성된 4인 가족이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제시되면서 주택 역시 4인 가족을 모델로 계획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아파트라는 새로운 주택유형이 급속히 보급되던 때 이기도 했다. 부부와 2명의 자녀에게 각자 방을 주기 위해 3개의 침실이 있는 85m2의 아파트가 국민주택이라 불리면서 전파됐다. 또한 전통적인 대가족 사회가 점차 핵가족화되면서 가족 구성원의 친밀도가 가정생활에서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다소 생소한 개념일 수 있는 ’가족단란행위’라는 것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이고 바로 그 가족단란을 위한 장소로서의 거실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 쯤이다. 즉 1920∼30년대 가장이 손님을 맞이하던 응접실이 1960∼70년대에 이르러 가족단란을 위한 거실로 변화하고 한 집에 하나이던 아동실은 이제 자녀 개인에게 독방을 주는 것으로 변화했다. 자녀수가 감소하면서 아이를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보고 각자에게 독방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주택은 또 한번의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자녀의 수는 더욱 줄어 외동아이인 경우도 많은데, 3개의 침실 중 아이가 침실 두 개를 쓰는 집이 있는가 하면, 아예 아이에게 안방을 내어주는 집도 있다.
거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작은 방안에 침대와 책상이 함께 있다 보니 옷과 책이 뒤엉켜 정리가 안 된다. 공부에 집중하라고 잠 자는 방과 공부하는 방을 따로 분리해 주게 된다.
요즘 대부분 자녀수가 줄어 외동아이가 되고 보니 그 아이에게 더욱 확실한 투자를 하기 위해 교육비가 많이 들고 그 교육비를 벌기 위해 부부는 맞벌이를 해야 한다. 부부가 집에 있는 시간이 줄다 보니 가장 좋은 안방은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은 아이에게 할애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점차 경쟁이 치열화되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이는 가장 든든한 자본이라 할 수 있는 학력자본을 취득해야 하고 그러자니 공부를 위한 별도의 방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요즘 주택은 새로운 사용방식이 나타나기도 한다. 부부와 외동이 자녀로 구성된 3인 가족이 3개의 침실이 있는 85m2의 국민주택에 살면서 어른 둘이 방 하나를 함께 쓰고 아이가 방 두 개를 쓰는 집이 늘고 있는 추세다.
백여 년 전의 문화주택을 보며 가장은 침실, 서재, 응접실을 쓰고 아내는 주부실을, 서너 명은 되었을 자녀들은 아동실이라는 방을 공동으로 쓰고 있다. 그렇다면 남편과 아내가 각 방을 쓰고 아이들은 모두 한 방을 썼단 말인가라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어른 두 명이 작은 방 하나를 함께 쓰고 아이가 공부방과 침실을 따로 쓰는 이 현상을 100년 전 개화기의 사람들이 보면 매우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이처럼 주택은 그 시대를 가장 민감하게 비추고 있다.
<건축칼럼니스트>
자신이 낮에 머무르는 서재, 밤에 잠을 자는 침실,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 그리고 아내의 방인 주부실과 자녀들을 위한 아동실로 구성된 것이다. 당시 자녀는 한 집에 대개 서너 명은 되었는데 아동실은 하나일 뿐이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연령과 성별의 구분없이 모두 한 방을 썼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해방 후 급격한 경제성장의 시기이던 1960년대부터 주택의 모습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다.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라는 가족계획의 구호 아래 부부와 두 자녀로 구성된 4인 가족이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제시되면서 주택 역시 4인 가족을 모델로 계획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아파트라는 새로운 주택유형이 급속히 보급되던 때 이기도 했다. 부부와 2명의 자녀에게 각자 방을 주기 위해 3개의 침실이 있는 85m2의 아파트가 국민주택이라 불리면서 전파됐다. 또한 전통적인 대가족 사회가 점차 핵가족화되면서 가족 구성원의 친밀도가 가정생활에서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다소 생소한 개념일 수 있는 ’가족단란행위’라는 것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이고 바로 그 가족단란을 위한 장소로서의 거실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 쯤이다. 즉 1920∼30년대 가장이 손님을 맞이하던 응접실이 1960∼70년대에 이르러 가족단란을 위한 거실로 변화하고 한 집에 하나이던 아동실은 이제 자녀 개인에게 독방을 주는 것으로 변화했다. 자녀수가 감소하면서 아이를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보고 각자에게 독방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주택은 또 한번의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자녀의 수는 더욱 줄어 외동아이인 경우도 많은데, 3개의 침실 중 아이가 침실 두 개를 쓰는 집이 있는가 하면, 아예 아이에게 안방을 내어주는 집도 있다.
거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작은 방안에 침대와 책상이 함께 있다 보니 옷과 책이 뒤엉켜 정리가 안 된다. 공부에 집중하라고 잠 자는 방과 공부하는 방을 따로 분리해 주게 된다.
요즘 대부분 자녀수가 줄어 외동아이가 되고 보니 그 아이에게 더욱 확실한 투자를 하기 위해 교육비가 많이 들고 그 교육비를 벌기 위해 부부는 맞벌이를 해야 한다. 부부가 집에 있는 시간이 줄다 보니 가장 좋은 안방은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은 아이에게 할애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점차 경쟁이 치열화되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이는 가장 든든한 자본이라 할 수 있는 학력자본을 취득해야 하고 그러자니 공부를 위한 별도의 방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요즘 주택은 새로운 사용방식이 나타나기도 한다. 부부와 외동이 자녀로 구성된 3인 가족이 3개의 침실이 있는 85m2의 국민주택에 살면서 어른 둘이 방 하나를 함께 쓰고 아이가 방 두 개를 쓰는 집이 늘고 있는 추세다.
백여 년 전의 문화주택을 보며 가장은 침실, 서재, 응접실을 쓰고 아내는 주부실을, 서너 명은 되었을 자녀들은 아동실이라는 방을 공동으로 쓰고 있다. 그렇다면 남편과 아내가 각 방을 쓰고 아이들은 모두 한 방을 썼단 말인가라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어른 두 명이 작은 방 하나를 함께 쓰고 아이가 공부방과 침실을 따로 쓰는 이 현상을 100년 전 개화기의 사람들이 보면 매우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이처럼 주택은 그 시대를 가장 민감하게 비추고 있다.
<건축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