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선학동 메밀밭
2013년 10월 03일(목) 00:00
바람 쉬는 언덕 흐드러진 ‘가을’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흔붓이(흐뭇하게)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혀 하얬다.…”

소설가 이효석(1907~1942)이 1936년 발표한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등장인물인 허 생원과 조 선달, 동이는 장에서 장으로 돌아다니는 장돌뱅이다. ‘호탕하게는 놀았다고는 하여도 계집하나 후려보지는 못한’ 허 생원은 달밤에 칠십 리의 밤길을 걸으며 젊은 시절 강원도 봉평 물방앗간에서 만난 인연에 대한 옛 기억을 끄집어낸다. ‘소금을 뿌린듯한’ 메밀밭을 지날 때다.

???2011년 선학동으로 마을명칭 변경?=?파~란 빛깔 하늘아래 새하얀 ‘소금꽃’이 피었다. 찜통더위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계절이 바뀌었다. 한순간 무더위가 꺾이고, 하늘빛도 한점 티없이 푸르고, 푸르다.

남녘 바닷가 마을에도 가을이 고스란히 내려앉았다. 장흥군 회진면에 자리한 선학동(仙鶴洞)은 메밀꽃이 한창이다.

이곳은 장흥출신 소설가 이청준의 소설 ‘선학동 나그네’의 배경이 된 마을이다. 이청준은 ‘서편제’(1976), ‘소리의 빛’(1977), ‘선학동 나그네’(1979), ‘새와 나무’(1980), ‘다시 태어나는 말’(1981) 등 각기 독립된 이야기를 담은 다섯 편의 소설로 연작소설 ‘남도사람’을 남겼다. 영화감독 임권택은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지난 2007년 자신의 100번째 작품인 ‘천년학’(千年鶴)을 연출했다.

‘선학동 나그네’는 어릴적 헤어진 소리꾼 누이동생을 찾아 남녘땅을 헤매고 다니는 이복 오라버니의 이야기이다.

영화 개봉후 촬영지인 마을을 찾는 이들이 늘자 45가구 100여명의 주민들은 마을뒤 비탈밭에 유채와 메밀을 심었다. 그래서 봄에는 노란 유채의 물결이, 가을에는 새하얀 메밀꽃밭이 꾸며졌고, 이러한 경관조성은 사진작가 등 마을을 찾는 발길을 더욱 유혹했다.

그리고 기존 행정구역인 ‘산아랫마을’ 산저리보다 ‘선학동’으로 전국적으로 알려지며 마을주민과 출향인들이 명칭변경을 희망함에 따라 지난 2011년 10월에는 조례개정을 통해 아예 ‘선학동’으로 마을이름을 바꾸었다.

소설에서는 “…마을은 예부터 이름이 선학동이라 하였다. 까닭인즉, 마을앞 포구에 밀물이 차오르면 관음봉이 문득 한마리 학으로 그 물위를 날아오르기 때문이었다…”고 묘사돼 있다.

??비상하는 학의 품에 안긴 선학동=?마을입구에는 영화 ‘천년학’ 세트장인 주막이 보존돼 있어 눈길을 끌었다.

일제 강점기때 마을앞 바다를 막아 만든 제방끝 동섬 자리이다. 주막앞에는 ‘선학동’이라 쓰인 큼지막한 마을비가 세워져 있다. 소설속에서 사내는 이 주막에서 묵으며 자신이 찾고자 하는 동생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마을은 높이 260m의 나지막한 공지산(소설에서는 관음봉) 아래 형성돼 있다. 마을에 들어서면형형색색 마을지붕 너머로 등고선을 따라 심어진 메밀밭이 한눈에 들어온다. 메밀밭으로 가는 오솔길에는 소설 문장을 옮겨 써 놓은 나무 팻말이 줄줄이 서있지만 세월이 흐른 탓에 제대로 읽어 보기는 힘들다.

메밀밭 끝자락에서 바라보면 푸른 하늘아래 흐드러지게 핀 메밀과 함께 황금 들녘, 파란 바다가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메밀꽃 필 무렵’과 같이 달뜬 밤이라면 ‘소금을 뿌린 듯’ 더욱 흐뭇한 풍경이리라.

소설 속에서 사내가 회진에서 버스를 하차해 서둘러 선학동으로 걸음을 서두르는 것은 포구에 물이들면 관음봉 산그림자가 비상하는 학의 형국을 지어내는 모습을 보기 위함이다.

하지만 30여년만에 찾은 포구는 바닷물대신 추수가 끝난 빈 들판으로 변해있어 비상학(飛翔鶴)의 모습은 자취를 찾을 수가 없다.

그믐에 가까운 때라 달이 떠오르길 기다리기는 어려운 시간, 멀리 남녘으로 가을을 찾아온 이의 가슴속에 한마리 학을 품고 총총히 되돌아간다.



■여행 메모=장흥군 회진면 산저마을(선학동)은 광주에서 약 110㎞, 장흥읍에서 30㎞가량 떨어져 있다. 장흥읍내에서 마을까지는 23번 국도를 따라 관산~회진을 지나 40여분 소요된다. 네비게이션 검색은 산저 마을회관이나 선학동 유채마을, 천년학 세트장을 입력한다. 이청준 작가의 고향인 진목마을은 지척이다. 문의(장흥군청 문화관광과 061-860-0226)?Bg/송기동기자 song@kwangju.co.kr?Bg/장흥=김용기기자 · 중부취재본부장 ky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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