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환의 세상읽기] 5월이 오면 보고싶은 얼굴
2013년 05월 17일(금) 00:00
경남 울산의 국수 공장 아들이었던 고복수는 20대 초반에 콜럼비아레코드가 주최한 부산 콩쿠르대회를 거쳐 서울에서 열린 본선에서 3위를 차지해 가수로 데뷔했다.

한숨을 쉬는 것 같은 애조 띤 음색과 창법이 유일한 한국인 음반업자 이철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이철은 그에게 1934년에 ‘타향’을 부르게 했다. 이철의 예감은 적중했다. ‘타향살이’로 널리 알려진 이 곡은 공전의 빅히트를 기록했다.

1934년만 하더라도 고향을 떠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국민의 80%가 농민이었고, 그들은 대부분 고향의 부모와 땅에 묶여 있었다. 그러나 고향에 있어도 식민지 생활은 타향살이였다.

고복수가 “타향살이 몇 해던가”하고 물으면, 식민지 백성들은 나라 잃은 지 몇 해째인가를 헤아리며 울먹이곤 했다.

고복수는 이듬해인 1935년 ‘사막의 한’을 불렀다. 이 노래는 식민지 생활을 사막의 유랑으로 바꿔놓았다. 식민지 백성들이 ‘타향’으로 모두 고향을 떠났다면, ‘사막의 한’으로 사막을 유랑하는 나그네가 된 셈이었다.

자고 나도 사막의 길, 꿈속에도 사막의 길/ 사막은 영원의 길, 고달픈 나그네 길/ 낙타 등에 꿈을 싣고, 사막을 걸어가면/ 황혼의 지평선에 석양도 애달파라.

저 언덕 넘어갈까, 끝없는 사막의 길/ 노을마저 지면은 둘 곳 없는 이 마음/ 떠나올 때 느끼며 눈물 뿌린 그대는/ 오늘 밤 어느 곳에 무슨 꿈을 꾸는고.

사막에 달이 뜨면 천지는 황막한데/ 끝없는 지평선도 안개 속에 쌓이면/ 낙타도 고향 그려 긴 한숨만 쉬고/ 새벽이슬 촉촉이 옷깃을 적시우네.

이 노래는 유행가였지만 유행가가 아니었다. 당시 서울의 전문학교 학생들은 주막에 모여 목이 쉬도록 이 ‘사막의 한’을 부르곤 했다. 그들에게 이 노래는 가장 비장한 운동가요였다. 어찌 학생들뿐이었으랴. 식민지 생활이 유행가를 온 백성의 운동가요로 만들었다.

상황이 유행가를 운동가요로 바꿔놓는 사례를 나는 광주에서 직접 겪었다. 내가 전남대 교수가 되어 광주로 내려온 것은 1981년 9월이었다. 아마 그 이듬해 5월이었을 것이다. 학교에서는 학생들 동향이 심상치 않다고 귀띔해주었다.

18일에 주룩주룩 비가 내렸다. 이 건물, 저 건물에 흩어져 있던 학생들이 비 내리는 교정으로 몰려나오더니 대오를 지어, 하루 종일 학교 구내를 돌았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그 애절한 ‘임을 위한 행진곡’이 빗속의 교정을 울렸다.

오후 서너 시쯤 되었을까? 비에 흠뻑 젖어 학생들 꽁무니를 따라다니던 나는 한기를 느껴 연구실로 발길을 돌렸다. 본부에서 사회대 쪽으로 난 오솔길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학생 대여섯이 우산도 받지 않고, 주저앉아 유행가를 부르고 있었다. 대중가요 가수 현미가 부른 ‘보고 싶은 얼굴’이었다.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걸어도/ 보이는 것은 초라한 모습 보고 싶은 얼굴/ 거리마다 물결이 거리마다 발길이/ 휩쓸고 지나간 허황한 거리에/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걸어도/ 보이는 것은 초라한 모습/ 보고 싶은 얼굴

울먹이다 울다 하며 부르는 그들의 그 노래를 들으며 나는 처음으로 “모골이 송연해진다”는 말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인지 실감했다. 그 유행가는 80년대 광주에서 어떤 운동가보다 더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처연한 운동가요였다.

30여 년이 훌쩍 지났지만 요새도 ‘임을 위한 행진곡’과 ‘보고 싶은 얼굴’을 들으면 나는 비 내리던 날, 그 노래를 부르던 학생들이 생각난다.

80년의 광주를 광주가 아닌 서울에서 지낸 것이 미안해지고, 80년의 한을 유행가를 통해 비로소 감정이입할 수 있었던 사실이 부끄러워진다.

그 대여섯 학생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그들과 이 5월에 노래방이라도 가서 목이 쉬도록 ‘임을 위한 행진곡’과 ‘보고 싶은 얼굴’을 함께 부르고 싶다.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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