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 마을 덮칠까 ‘벌벌’…주민들 뜬눈으로 밤 지새
2026년 01월 22일(목) 20:50
르포-광양 산불 현장 가보니
주택 화재, 인근 야산으로 번져
화마 훑고 간 산자락 잿더미
옷도 못 챙긴 채 황급히 탈출
연기·탄 냄새 대피소까지 진동
49㏊ 태우고 19시간만에 진화

지난 21일 광양시 옥곡면 묵백리의 한 단독주택에서 불이 나 인근 야산으로 번졌다. 화재가 발생한 주택의 화목보일러와 인근 장작들이 불에 그을린 모습.

“평생 이 동네서 살아왔는디, 저만한 큰 불이 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놀란 가슴이 가라앉질 않아서 밤새 잠을 설쳤제.”

22일 오전 찾아간 광양시 옥곡면 백운산 일대 점터마을은 입구부터 매캐한 탄 냄새로 가득했다.

코끝을 강하게 찌르는 냄새와 함께 마을 하늘은 산에서 내려오는 타버린 잿가루들이 겨울바람을 타고 떠다녔다.

전날부터 대피령이 떨어지면서 마을에는 오가는 주민 한 명 찾아볼 수 없었고 산불 진화 헬기에 방향을 잃은 매서운 겨울바람이 마을로 떠밀려 내려왔다.

밤새 화마가 훑고 지나간 산자락은 낙엽과 잡초조차 보기 힘들 정도로 바싹 타버려 앙상한 나무만 남아 있었다. ‘완진’ 판정이 내려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금세 산불이 다시 일어날 것만 같은 위압감을 줬다.

22일 광양시 옥곡면에 마련된 화재 임시 대피소인 옥구슬건강문화센터에서 주민들이 점심으로 배분된 도시락을 먹고 있다.
이곳에서는 지난 21일 오후 3시께 산불이 발생했다. 광양시 옥곡면 묵백리의 한 주택에서 시작된 화재가 산불로 번진 것으로 추정됐다.

불은 19시간이 넘게 뒷산을 태우며 마을을 공포의 화염 속으로 몰아넣었다. 산불로 축구장 70개 규모인 49여㏊ 임야가 불탔으며, 옥곡·진상면 일대 5개 마을 주민 601명은 부랴부랴 마을회관 등으로 임시 대피했다.

전날 밤부터 옥곡면 임시 대피소인 옥구슬건강문화센터에 모여있던 주민들은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한 채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화재 현장 옆집에 거주하는 양주원(72)·이미엽(여·68)씨 부부는 “탄 냄새가 나 밖으로 나가보니 불이 순식간에 산으로 번졌다. 차로 대피해 지켜보는데 창고 뒤편이 다 타들어가 벌벌 떨었다”며 “불이 온천지에서 도깨비불처럼 번쩍번쩍했다. 바람을 타고 불길이 집을 덮칠까 무서워 대피소에서도 한숨도 못 잤다”고 한숨을 쉬었다.

소방차와 대원들이 출동, 하루 종일 진화 작업에 착수했으나 불길을 잡지 못했고 화재 발생 1시간도 못돼 대응 1단계를 지나 2단계(오후 4시 31분)로 상향됐다. 오후 5시 5분에는 소방청 국가동원령이 내려지면서 산불전문진화차와 인력, 헬기 등이 전국에서 추가 투입될 정도로 산불은 커졌다.

안정희(여·82)씨도 “평생 이곳에서 살아왔지만 산불은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다. 급하게 나오느라 옷도 제대로 못 챙겨입었다”며 “밤새 연기와 탄 냄새가 대피소까지 진동해 잠을 설쳤다. 집에는 피해가 없다고 해 그나마 다행”이라고 밝혔다. 산불 발생 3시간이 지난 전날 저녁 6시 30분께 진화율도 고작 56%에 머물렀을 정도로 강한 바람에 불씨는 산을 넓게 타고 돌아다녔다.

소방당국은 첫날에만 소방·경찰 등 1654명을 투입하고 193대의 장비를 동원한 데 이어 이튿날에도 2646명의 인력을 투입했다. 장비도 228대를 추가 투입하며 밤샘 진화에 나서면서 22일 오전 10시30분께 불길을 잡았다.

같은 시간 인근 진상면 임시 대피소인 백학문화복지센터에 모인 주민들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대피한 주민들은 과거 대형 산불이 전국을 덮쳤던 사례들을 떠올리며 밤새 큰 피해로 이어지지 않기만 기도하고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최강자(여·82)씨는 “대피 방송을 듣고 지난해 영남 대형 산불이 떠올라 너무 무서웠다”며 “불로 산이 벌겋게 물들어 불길이 동네를 삼킬까 걱정했는데 큰 피해는 없는 것 같아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정차현(25)씨는 “일 때문에 순천에 와 있다가 광양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조부모 댁으로 방향을 틀었다”며 “혹시 큰일이 날까 두려웠는데, 두분 모두 안전하셔서 마음이 놓인다. 불이 꺼진 이후로도 현실감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주민들은 낮 12시를 기점으로 주민 대피 명령이 해제되는 휴대전화 안전안내문자를 받았지만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소방 헬기가 재발화를 막기 위해 화재 영향구역 일대에 물을 계속해서 뿌려댔고 대원들도 산불 진화용 등짐 펌프를 멘 채 산을 오르내리며 잔불을 점검했다. 언제 재발화로 이어질 지 모른다는 생각에 일부 주민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했다.

소방당국은 이날 오전 ‘완진’ 판단이 내려졌지만 건조하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씨 탓에 재발화할 가능성이 있어 완진 여부는 주말이 돼야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산불은 꺼졌지만 광양과 여수 일대는 여전히 건조주의보가 내려진 상태다.

박대성 광양소방 소방안전조사팀장은 “밤샘 진화로 안전사고 위험과 추위 등으로 진화에 어려움이 많았다. 바람이 불고 날씨도 매우 건조해 민가로 불길이 확산될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며 “주말까지 재발화 가능성이 있는 만큼 철저하고 안전하게 잔불을 정리하겠다”고 했다.

/글·사진=윤준명 기자 yoon@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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