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의 방식 - 이보람 예향부 부장
2025년 11월 05일(수) 00:20 가가
예술가가 알고리즘을 다루고 엔지니어가 느낌을 디자인하는 시대. 예술과 기술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다. 융합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예술이 기술을 삼키는 것도 아니고 기술이 예술을 밀어내는 것도 아니다. 다만 또 다른 방식의 창작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작품이라는 결과물보다 과정과 시스템을 중심에 두는 창작 방식이 확산되면서 전통적인 예술 개념 역시 틀을 벗어나 확장되고 있는 모습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의 크리에이터스 레지던시는 이 변화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현장이다. 센서와 모터, 조명, 데이터, 사운드, 프로그래밍이 창작의 재료가 되고 협업의 범위는 화가나 조각가뿐 아니라 공학자와 음향 디자이너, 무대기술자까지 넓어졌다. ACC 창·제작 스튜디오에서 본 작가들의 프로젝트는 그 흐름을 잘 보여준다. ‘ADHD’는 빛과 움직임을 다루는 기술을 활용해 공간 연출이나 아트 오브젝트를 창작하는 팀이다. 천장 가득 수많은 와이어에 매달린 커다란 구조물이 코드에 따라 흔들리고 빛과 진동에 맞춰 움직인다. 설치미술 같지만 실험 장비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무대 리허설 같기도 하다. 기술이 형태를 만들고 예술이 리듬을 조율하는, 기술적 조정과 미적 판단이 한 동선 안에서 이뤄지는 풍경이었다.
또 다른 스튜디오에서 만난 아버 작가의 작업도 비슷한 결을 지닌다. 조명과 센서 장비가 보는 이의 움직임을 감지하며 빛을 생성한다. 아버 작가는 움직임과 장치를 연결해 인간의 감각과 움직임이 디지털 환경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확장되는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작가는 기계가 인간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통해 표현의 범위를 넓히는 창작 방식을 실험하고 있었다.
ACC가 보여준 창작의 방향은 단순히 예술이 기술을 빌리는 것이 아니었다. 기술이 감각을 만들고 예술이 시스템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결과보다는 과정이, 장르의 구분보다는 경험 설계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예술과 기술을 나누는 기준이 흐려진 요즘, 창작은 그 사이에서 새로운 형태를 얻는다. 창작은 이제 도구가 아니라 방식의 문제다.
/이보람 예향부 부장 bo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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