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는 마음- 고성혁 시인
2025년 08월 27일(수) 00:20
누군가의 얘기다. 어느 날 그는 아웃 바운드 콜센터의 전화를 받았다. 콜센터 직원은 쏜살처럼 원하는 말을 했고 그 얘기를 끝까지 경청한 그는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라고 답했다. 일순 정적이 흘렀고 얼마 뒤 그녀가 울먹였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는 말씀 새기며 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동안 받았을 그녀의 상처가 고스란히 전해져 그의 코끝도 찡해졌다. 누구도 쉬 건네지 않은 말, 그랬으니 전혀 생각지도 않았을 말.

눈시울이 뜨거워진 나는 얼마 전 내가 겪은 비슷한 경험을 떠올렸다. 동네 슈퍼 앞에 비쩍 마른 여자노인이 집채만 한 폐휴지 리어카를 잡고 끙끙대고 있었다. 굴참나무 껍질 같은 주름살투성이 노인의 모습이 안쓰러워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리어카를 밀고 있을 때 이상한 듯 노인이 고개를 돌려 뒤를 살펴보더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하요, 감사하요이!” 골목을 꺾고 사라질 때까지 진심을 다해 말하는 노인을 보며 생각했다. 무엇이 노인에게 저토록 감사하는 마음을 우러나게 한 걸까. 그리하여 나는 왜 더 많은 도움을 다짐하게 되는 것일까….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더 큰 감사의 마음을 불러일으킨 때문이었다.

상처가 많은 사람일수록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그런 행동이 상대에게 더 큰 선한 마음을 불러내는 선순환. 감사하는 마음이 더 큰 감사를 불러오는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었다. 우리 모두 상대의 말에 조응할 수밖에 없는 보편적이면서도 상대적인 존재이잖은가.

개인적으로 마음을 다해 감사하는 분들이 있다. 낮고 더 낮아져 세상의 아픔을 온몸으로 껴안고자 했던 쟁이. 농부였고 광부였고 피혁공장의 새벽(朝學) 선생이었던 시대의 스승, 김민기 선생님. 수많은 젊은이와 어려운 시민단체에게 희망을 줬으면서도 인터뷰어를 응시한 채 입을 꾹 다물고 그 사실을 단 한 번도 얘기하지 않은 시대의 고집쟁이 어른 김장하 선생님. 평생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작은 마을 교회의 종지기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신 권정생 선생님. 고통 받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이태석 신부님.

이분들도 어린 시절부터 상처를 겪은 분들이었다. 고통스런 절망 속에서도 버릇처럼 감사하며 남을 호명하고 사랑하신 이분들. 그랬으니 내 것을 떼어 타인에게 아낌없이 내주지 않았나. 또 있다. 지난 12·3 내란 때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남태령과 한남동으로 바람처럼 달려간 키세스 시위대. 그동안 소외되고 상처받았던 노동자, 농민, 장애인과 여성의 이 연대세력은 누구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처럼 아름답고 위력적인 모습을 보였을까. 5·18 민중항쟁에서 숨져간 분들이 아니었을까?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 죽음이 닥칠 것을 알면서도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야말로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외쳤던 윤상원,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라고 울부짖었던 박용준, 그 외 시민 열사들. 민주주의를 향해 목숨을 바친 이분들의 의로움을 향한 게 아니었을까?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으니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의기를 실천한 이분들이야말로 최고의 감사 대상일진대 나는 감히 저 “영원한 삶과 찌르고 아프게 하는 양심”의 심연을 차마 짐작조차 할 수 없을까. 도대체 이분들은 누구를 향한 어떤 마음, 어떤 생각으로 이런 숭고한 아름다움을 구현한 것일까? 그리하여 우리에게 이와 같은 원초적 감사의 마음을 배태하게 한 것일까.

무한경쟁 속에 살아남아야 하는 압박감, 그 압박을 당연하다는 듯 고무하는 이 불안한 세상. 12·3 내란으로 찢겨버린 민심을 타고 올라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려는, 아직도 제거되지 않은 저 간교한 무리들. 지금 같은 때 감사하는 마음이 필요한 게 아닐까? 감사하는 마음과 이에 호응하는 삶, 감사하는 마음을 퍼뜨리고 퍼뜨려 공동체적 삶을 조금씩 넓혀야 하는 게 아닐까?

이상기온으로 아직 뜨겁다. 이 가시지 않은 여름 속에 끝까지 노고가 많으신 급식 노동자들, 청소 노동자들, 택배 노동자들, 위험 속에서 스스로 안전을 챙겨야 하는 지하·고공·공작기계 노동자들, 들과 밭에서 땀 흘려 일하고 계시는 계절 노동자들, 외국인 근로자들, 그 밖에 우리 모두를 위해 애쓰시는 모든 농민과 근로자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고개 숙여 그분들의 노고에 존경과 위로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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