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광주정신’에 대하여- 김형중 조선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인문도시광주위원회 위원장
2025년 06월 30일(월) 00:00
얼마 전 ‘5·18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 청원에 서명했다. 그간 써온 글, 강연에서 뱉은 말들에 대한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5·18정신’이 헌법 전문에 수록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도대체 ‘5·18정신’이란 무엇일까? 과연 이 질문에 대해 속 시원하게 답해 줄 이가 있기나 할까? 정신이라는 말은 참 모호해서 내가 언젠가부터 5·18을 호명할 때 대체로 ‘항쟁’이나 ‘민주화운동’ 같은 성격 규정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또 ‘광주정신’이나 ‘오월정신’ 같은 말도 잘 사용하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다. 대신 나는 그저 숫자만 표기하는 ‘5·18’이나 ‘절대공동체’ 혹은 ‘무한텍스트’란 말을 선호하는데, 그런 이면에는 ‘5·18정신’이 특정한 시기 특정한 가치에 국한되지 않고 이후로도 무한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투영되어 있다. ‘5·18정신’이 영원하기를, 그러나 다시 그 ‘5·18정신’이 문제다.

1990년대 후반, 혹은 2000년대 초반부터 많은 이들이 ‘5·18정신’을 ‘민주·평화·인권’의 3대 가치로 요약하곤 했다. 5·18기념재단 창립 선언문이나 설립 취지문에도 명시적으로는 이 3대 가치가 제시되어 있지 않고 몇몇 연구자들에게 물어도 정확한 답을 얻지는 못한 형편이니, 나로서는 그 기원을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제 저 3대 가치에 대해 의문을 던질 시점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확신하는 편이다. 그간 ‘민주·인권·평화’라는 3대 가치가 발휘해 온 위력과 역할을 부인하자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어떤 강력한 가치들도 낡거나 뒤처진 것으로 만드는 것이 상례다.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평화도 마찬가지다.

가령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범박하게 말해 ‘백성(국민)이 주인인 국가 체제’ 정도가 그 정의일 텐데. 지금의 국가 체제하에서 백성의 주인됨은 선거를 통한 주권 행사가 보장한다. 이 말은 18세 이상, ‘시민권을 가진 살아 있는 인간들’이 이 체제의 주인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 유명해진 작가 한강의 물음, ‘죽은 자가 산 자를 구원할 수 있는가’ ‘과거가 현재를, 그리고 현재가 과거를 구원할 수 있는가’ 같은 문장을 염두에 둘 때, 살아 있는 자들만의 민주주의는 어딘가 제한적이다.

‘5·18 기념 투쟁’의 역사를 혹자는 ‘애도의 정치’라고도 부르거니와 애도 과정에서 과거에 죽은 자들은 살아 있는 자들보다 더 강력한 주권을 행사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과거만 그럴까?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를 따라 한국의 정치철학자 진태원이 최근 ‘미래의 유령들’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미래에 죽었을 사람들, 그러니까 아직 살아있지 않지만 미래에 살아있게 될 인간들에게도 정당한 주권이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의 어떤 잘못된 선택이 그들에게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을 운명을 부여하지 않도록, 그들 역시 미리 의석에 앉혀 발언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기후재난이 이미 눈앞에 닥쳐버린 이 시점에, ‘민주주의’란 말에 깊이 뿌리박힌 인간중심주의도 반성의 대상이 되어야 할 듯하다. 평등 원칙에 관한 한 가장 급진적이었던 사상가 마르크스마저 ‘노동력’에 말과 소의 땀을 포함시키지 않았고, 이제 사라져버린 현실사회주의 국가들도 이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지구라는 행성에 거주하는 ‘비인간’ 존재자들은 항상 인간에 대해 재화이자 소비재였을 뿐 어떠한 경우에도 정치적 평등의 대상으로 등극한 바 없다. 그나마 최근 사물들의 민주주의, 비인간 권리 담론의 급증은 반길 만 한 일이다.

이제 굳이 ‘인권’이란 가치의 인간중심주의에 대해 덧붙일 필요는 없을 듯하다. 다만 최근 세계적 차원에서 급증하는 난민 문제, 국내의 경우 외국인 이주자들의 처우 문제 등이 기존의 인권 담론으로 포괄 가능한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는 점만은 강조해 둔다. 그러니까 인권이란 가치 또한 논란의 여지가 충분하다. 물론 ‘평화’ 역시 마찬가지다. 대체로 ‘개인간 집단간 국가간 갈등과 분쟁이 없는 상태’만을 지칭하게 될 경우, 이 용어는 인간이 지구라는 유한한 행성에 거주하는 다른 비인간 존재자들과 항상적인 분쟁 관계를 계속하도록 조장하거나 방치할 수밖에 없다.

말이 좀 거창해졌다. 게다가 이 글을 쓰는 나로서도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 다시 5·18정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역량이 아직 없다. 다만 5·18이 끝없이 재해석되고 다시 쓰여야 하는 ‘무한텍스트’라면 저와 같은 질문들을 감당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러지 못할 경우 수많은 다른 사례와 마찬가지로 역사 속의 한 사건으로 굳어지고 말 것이라는 경고 정도는 해두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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