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 산재 피해자들이 뭉치는 까닭은
2025년 05월 20일(화) 19:35
고통 나누고 일터 안전하게…전남노동권익센터, 지역 첫 자조모임 결성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미승인 산재 노동자·유가족 등 누구나 참여 가능
지난해 지역 산재 1만6천여명…멘토링 등 트라우마 극복하고 정보 공유

/클립아트코리아

#.A(33)씨는 최근 산업재해를 입고도 끝내 산재 신청을 하지 못했다. 장성군의 한 사업장에서 입사 3개월만에 부상을 입은 A씨는 회사로부터 ‘산재처리를 하지 말고 공상처리를 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A씨는 “산재 처리를 하면 고용노동부에서 점검을 나온다며 못 하게 했다”며 “회사 눈치도 보이고,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산재 신청을 꿈도 꾸지 못했다”고 말했다.

#.B(55)씨는 14년간 반복적인 용접 및 절단 작업을 하다 광양제철소의 한 협력업체에서 일하다 지난해 10월 부비동암(코곁굴암) 진단을 받고 산재 신청을 냈다. 이 때 회사는 ‘피해 당사자가 직접 산재를 입증하라’고 요구했는데, B씨는 어떻게 피해를 입증해야 할지 몰라 몸이 아픈 상황에서도 노동자 지원 시설, 지인 등 사방으로 도움을 요청한 끝에 겨우 산재 신청을 할 수 있었다.

#.C(39)씨는 지난해 10월 순천 율촌산단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근무하다 추락사고를 당해 목 부위를 다쳤다. 고개를 돌리는 일조차 어려워지고 심리적으로 외부 활동조차 꺼려지는 등 후유증이 남았지만, 도움을 받을 방법을 몰라 수개월을 혼자서 끙끙 앓기만 했다. C씨는 결국 심리지원 상담을 받으며 조금씩 회복하고 있다.



산재 피해를 입은 노동자들은 “산재를 당한 뒤 이를 입증하는 과정에서 혼자만의 싸움을 한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비정규직·일용직·협력업체 노동자의 경우 조합 등에 가입돼있지 않은 노동자들이 대다수라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만나 힘을 합친다는 건 더욱 어려웠다는 것이다. 스스로 정보를 찾고, 혼자 회사를 상대해야 하는 과정에서도 무력감을 느꼈다는 것이 산재 피해자들의 이야기다.

산재로 인해 복합적인 고통을 안고 있는 노동자들을 위한 광주·전남 최초의 산재 피해자 중심의 민간 자조모임이 만들어진다.

같은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 함께 정보를 나누고 정신적 회복도 도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보자는 취지다.

지난해 광주·전남 지역의 산업재해자는 1만6075명. 이 중 사망자는 245명에 달했다. 지난 2023년에도 1만4878명이 산재 피해를 입었고 206명이 숨졌다. 이런데도, 대기업과 국내 최대 석유화학산단, 국가 산단 등이 밀집한 광양·순천 등 지역에 실질적인 피해자 네트워크가 전무한 실정이다.

전남노동권익센터는 광주·전남 지역에서 산재 경험을 공유하고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반영, 피해자 모임 결성에 나서게 됐다. 참여 대상은 산재 경험자뿐 아니라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 ▲미승인 산재 노동자 ▲산재 유가족 ▲직업병 피해자 ▲산업안전에 관심 있는 노동자 누구나 가능하다.

센터는 자조모임의 활성화와 초기 정착을 위해 ▲산재 경험자 멘토링 시스템 ▲노무사 연계 무료 상담 프로그램 ▲산업재해 스트레스·트라우마 극복 프로그램 등도 마련해 운영할 계획이다.

20일부터 모임 결성 취지를 알리면서 오는 6월 9일까지 ‘산재 피해자 자조모임’ 참여자 모집에 나설 예정이다. 모임을 계기로 광주·전남 산업재해 피해자들 뿐 아니라 전국 ‘산업재해 피해가족 네트워크’ 등과도 교류하면서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담아 안전한 일터 만들기에 힘을 보태겠다는 구상이다.

문길주 전남노동권익센터장은 “어디에도 갈 데 없고, 말할 데가 없어 마음속으로 앓고 있던 분들이 이번 공고 이후 문의를 많이 해오고 있다”며 “산재를 입은 노동자들이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고 느낄 수 있는 작은 시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진아 기자 jingg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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