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필과 함께하는 영화산책 <21>‘미키17’
2025년 03월 14일(금) 09:10
2054년 미래 지구 그린 봉준호식 디스토피아물
무한히 재생산되는 ‘나’들이, 진짜 내가 아니라면

봉준호 감독의 영화 ‘미키17’이 최근 224만 관객을 돌파했다. 미키17(오른쪽)과 18번이 크리퍼들 앞에 서 있는 모습.

거창한 실존을 운운할 것 없이 당장의 현존이 버거운 시대다. 진짜 나를 방에 뉘어두고 복제된 몸을 밖에 내보내는 상상, 한번쯤 해봤으리라.

그러다 온전한 '나'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지. 그래도 괜찮아, 라고 말해줄 수 있다. 애당초 복제본(시뮬라크르)과 진실이 혼재하는 세계 속 본질이 무엇인지 답하기 어려운 요즘이기에.

2054년 지구에서 진위(眞僞)의 가치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복제 인간들이 모로 행동하고 임무를 수행하는, 보드리야르식으로 말하자면 “거짓이 ‘실재’로 둔갑한 하이퍼리얼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런 와중 미키의 관심사는 그저 자신을 추적하는 사채업자 다리우스를 피해 달아나는 것뿐이다.

친구 티모와 함께 차렸던 마카롱 가게가 망한 뒤, 미키는 정치인 마셜(마크 러팔로 분)의 얼음행성 개척단에서 위험한 일을 도맡는 ‘익스펜더블’ 역에 자원한다. 사전적 의미로 ‘소모용(expendable·형용사형)’을 지칭하는 이 역할의 목표는 분명해 보인다. 목숨을 내걸고 인류 문명의 진일보에 일조하는 것이다.

진보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인간의 기억을 저장한 채, 새로운 몸을 만들어 내는 ‘휴먼 프린팅’ 기술은 주요 소재 중 하나다.
여기 ‘미키 no.17’이 있다. 열여섯 차례 ‘소모(죽은)’된 뒤 휴먼 프린팅 기술을 통해 인쇄된 미키 반슨(로버트 패터슨)의 새 몸이다.

미래 디스토피아를 그린 봉준호 신작 ‘미키17’이 최근 누적 관객 수 224만을 돌파하며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자신만의 영화 언어를 정립한 봉준호의 작품이 주목받는 것은 예상했던 일이다.

영화는 무수한 죽음을 나열하면서 시작된다. 소각로(사이클러)에 떨어지는 미키, 혹독한 행성 니플헤임으로 향하는 우주선에서 손목이 잘리는, 방사능에 피폭된, 피를 토하는 미키 등.

그의 역할은 ‘꼬리 없는 실험 쥐’ 자체인데 고난도 임무를 빙자한 온갖 인체실험을 당하며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진보된 기술 덕분에 아무리 죽어도 ‘LOAD’·‘RUN’ 버튼만 누르면 기억을 간직한 미키가 다시 태어난다. 거듭된 죽음으로 생명의 가치가 희석될 때쯤 작품은 현실로 플래시백.

활기찬 “Oh Mickey(브링 잇 온 OST)”가 흘러나오던 예고편과 달리 본편은 어떤 희망도 없다. 미키의 배에 새겨진 ‘17’이라는 숫자마저 개척자 프론티어 정신의 표상이라기보다 수인번호나 정형화된 코드, 비생물적 무엇으로 읽힌다.

두 명 이상의 미키가 조우하는 ‘멀티플 상황’이 펼쳐지면서 본격적인 파국이 시작된다.

두 복제인간이 마주하면 하나 이상이 죽는다는 도플갱어 패러독스가 떠오르지만, 작품은 그런 불문율보다 두 주체의 ‘병존’에 대해 논한다. 격정적인 18번, 내면에 불꽃을 간직한 17번은 저마다 미키의 야누스적 버전들이다. 둘이면서 하나인, 하나이면서 둘인 주체의 공존은 존재의 다면성에 대한 은유에 가깝다.

결말 외에 원작 소설 ‘미키7’과 다른 부분은 철학적 메시지를 조금 더 완곡하게 전한다는 점이다. 개봉과 맞물려 원작 장편소설도 판매 10만 부를 돌파했다.

얼음 행성을 개척하는 17번 미키는 탐험 중 크레바스에 갇힌다. 폐기 후 18번 미키를 프린트하지만, 기적적으로 생환한 17번의 존재로 인해 영화는 ‘복잡’해 진다.
한편 책에서도 언급됐던 ‘테세우스 배’ 역설은 작품을 깊게 들여다보는 프리즘으로 작용한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후 배를 타고 탈출했다. 아테네인들은 이 배를 오랜 시간 보존했고 판자가 썩을 때마다 새것으로 교체했다. 이때, 배의 모든 부분을 갈아 끼운 테세우스의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일까?

형이상학적 난제에 답을 낼 순 없지만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미키17과 18이 조우한 뒤 각자 생존투쟁을 펼치는 모습, 인류가 니플헤임에서 크리퍼와 공존을 선택한 장면 등에서 비춰볼 때 ‘모든 존재 방식에 대한 당위’다. 인간의 본질이 영육에 있는지를 넘어 정체성의 문제를 고민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이 흘러도 대상이 같은 형상을 유지한다면 그것은 같은 존재라 여겼다. 반면 존 로크는 대상을 이루는 물질이 그대로라면 그것이 바로 동일한 것이라 주장했다.

배처럼 인간 세포도 7년여 시간을 주기로 모두 교체된다. 과연 얼마큼의 나를 ‘나’라 부를 수 있을까.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르스’ <ⓒMaestro di Tavarnelle>
말미에서 미키가 “‘18’번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라고 읊조리며 프린트를 폭파시키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기실 18번이 미키 자아의 일면이라는 점에서, 모든 선택과 결과는 ‘나’라는 주체 하나로 수렴된다. 그런 와중 괴생명체 크리퍼와의 공존으로 나아가려는 미키의 선의는 공동체성 회복 가능성을 위시한다.

진실과 거짓의 질곡에 허둥대는 인류를 둘러싼 장면들은 비인간성의 전형을 보여준다. 우주 소동극이라기엔 일어날 법한 사건을 핍진하게 그려 무겁고, 리얼리티라기엔 환상적 이미지들이 우리를 현실에서 한 걸음 멀게 한다.

이번 작품이 ‘뉴 노멀’을 개척하고 있는 봉준호식 영화예술의 한 극지라면, 이번 탐험에서 관객들도 무언가 ‘발견’할 것으로 기대된다.

/최류빈 기자 rub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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