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은 ‘침묵의 달, 무소유의 달’- 곽성구 전 광주일고 교사
2024년 12월 16일(월) 21:30 가가
국화꽃이 져버린 겨울 정원에는 적막이 흐른다. 이른 아침 창문을 열면 하얗게 무서리 내려 무더위 찬란했던 여름과 가을의 만산홍엽 잔치는 이제 추억으로만 남게 한다. 세월이 참으로 빨리도 지나간다.
12월을 보내며 인디언들의 지혜를 따라가 본다. 인디언들은 약탈당한 땅과 자존심을 가슴 깊이 묻으면서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한다. 인디언들은 12월을 ‘침묵의 달, 무소유의 달’이라 한단다. 쓸쓸한 거리에 딩구는 낙엽의 잔해를 밟으며 그것을 남긴 벌거벗은 나목을 바라보면 침묵하는 자연과 미련없이 버려진 지혜를 바라본다. 세상에는 무한한 것이 없고 인간의 잔혹한 욕심은 서로를 멸망의 세계로 달려가게 하는 제동장치 없는 기관차의 질주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디언들은 총과 병균 등을 가지고 들어온 백인들에게 비록 삶의 터전을 빼앗겼지만, 전통과 문화를 잃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시애틀 추장을 비롯해 여러 부족들이 남긴 연설문은 잔잔한 울림을 준다.
“내가 보기에 당신들의 삶에는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당신들은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들을 쫓듯이 부와 권력을 따라 뛰어다닌다. 그러나 손에 움켜잡는 순간 그것들은 힘없이 부서져 버린다. 당신들은 사랑을 말하지만 확실하지 않고, 약속을 말하지만 그것도 분명하지 않다. 당신들의 현재는 더없이 불안해 보이고, 마치 집 잃은 코요테가 이리저리 헤매는 것과 같다.”
그들은 외부의 현상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내면을 응시하는 눈을 잃지 않았다. 한 해를 마감하는 달 12월을 ‘침묵하는 달’ ‘무소유의 달’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어느새 12월도 중간을 넘어가고 있다. 산수(傘壽)를 눈앞에 둔 친구들과 산책하면서 나의 짧은 질문은 언제나 “친구, 인생은 아름다운가?”라는, 나도 정답을 모르는 질문을 잠깐 동안은 “이 앞에 펼쳐진 단풍이 아름답지 않은가”는 모범 답안지가 없이 정답이다. 나의 주변의 문제들로 나의 번뇌만 복잡할 뿐 세상은 역시 아름답고 그래서 인생은 아름다운데 나의 절대고독만 번뇌로 복잡할 수도 있다.
‘무소유’, 법정스님이 불필요한 것을 지니지 않은 것이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라 가르쳐 주신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 또한 나는 분명 통장의 숫자가 무겁기를 바라고 노력하고 있는 지극히 수준 낮은 사람이다. 이 역시 내 의지대로 되지를 않아서 걱정인 속물근성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12월, 침묵과 무소유의 계절에 우리 주변은 계엄의 소용돌이와 한강의 노벨상 축제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한강은 조용하고 부드럽지만 강한 목소리로 광주를 잔혹과 존엄이 공존하는 보통명사로 정의하였다. 우리의 현실은 또 그가 남긴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라는 질문과 감탄에 깊은 공감을 가질 수 밖에 없어서 내 마음도 따라가 올려 놓는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품격 있는 세계로 바꾸어 놓았다. 다른 사람의 경우가 아니라 나의 경우이다. 눈이 어두워 책 읽기에 소홀했던 나를 시내 서점으로, 인터넷 책 구입으로 젊은 애들에게 책을 구하느라 분주한 생활도 하였다.
내 책상 위에 놓인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는 아름다운 언어로 고통을 묘사하고 책 내용이 현실화된 한국 상황이 기묘하다는 평이다. 그리하여 많은 국민들에게 정독을 요구하는 시대적 필독 목록이 되었다. 채식주의자는 이미 읽었던 것을 이번에 다시 읽어서 한강의 소설 구조를 파악하는 정도에서 머무르고 있고 ‘소년이 온다’는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를 않는다. 춘향전이나 황순원의 소나기, 호손의 큰바위 얼굴을 가르쳤던 나의 의식구조는 한강의 군데군데 어느 곳의 소설구조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기에 조금은 많이 벅차다.
솔직히 한강의 소설에 대한 대화에서 나의 짧은 지식으로는 참여가 어려워 또 다시 침묵으로 대답하여야 할 것 같다. 나의 뇌리에 남아있는 소유는 이제 거의 소진되었다. 같이 외치고 싶은 메시지가 다가온다. 조용하지만 강렬한 외침, 스웨덴 밤을 빛낸 한강의 “생명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라는 메아리가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2024년 지독한 12월의 나의 ‘침묵’과 ‘무소유’는 더 깊게 심연으로 침잠하여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소유를 탐하는 속물근성을 없애야겠다. 밖에는 더 깊고 성숙한 침묵을 바라는 차가운 바람만 거세다.
12월을 보내며 인디언들의 지혜를 따라가 본다. 인디언들은 약탈당한 땅과 자존심을 가슴 깊이 묻으면서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한다. 인디언들은 12월을 ‘침묵의 달, 무소유의 달’이라 한단다. 쓸쓸한 거리에 딩구는 낙엽의 잔해를 밟으며 그것을 남긴 벌거벗은 나목을 바라보면 침묵하는 자연과 미련없이 버려진 지혜를 바라본다. 세상에는 무한한 것이 없고 인간의 잔혹한 욕심은 서로를 멸망의 세계로 달려가게 하는 제동장치 없는 기관차의 질주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디언들은 총과 병균 등을 가지고 들어온 백인들에게 비록 삶의 터전을 빼앗겼지만, 전통과 문화를 잃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시애틀 추장을 비롯해 여러 부족들이 남긴 연설문은 잔잔한 울림을 준다.
‘무소유’, 법정스님이 불필요한 것을 지니지 않은 것이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라 가르쳐 주신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 또한 나는 분명 통장의 숫자가 무겁기를 바라고 노력하고 있는 지극히 수준 낮은 사람이다. 이 역시 내 의지대로 되지를 않아서 걱정인 속물근성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12월, 침묵과 무소유의 계절에 우리 주변은 계엄의 소용돌이와 한강의 노벨상 축제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한강은 조용하고 부드럽지만 강한 목소리로 광주를 잔혹과 존엄이 공존하는 보통명사로 정의하였다. 우리의 현실은 또 그가 남긴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라는 질문과 감탄에 깊은 공감을 가질 수 밖에 없어서 내 마음도 따라가 올려 놓는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품격 있는 세계로 바꾸어 놓았다. 다른 사람의 경우가 아니라 나의 경우이다. 눈이 어두워 책 읽기에 소홀했던 나를 시내 서점으로, 인터넷 책 구입으로 젊은 애들에게 책을 구하느라 분주한 생활도 하였다.
내 책상 위에 놓인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는 아름다운 언어로 고통을 묘사하고 책 내용이 현실화된 한국 상황이 기묘하다는 평이다. 그리하여 많은 국민들에게 정독을 요구하는 시대적 필독 목록이 되었다. 채식주의자는 이미 읽었던 것을 이번에 다시 읽어서 한강의 소설 구조를 파악하는 정도에서 머무르고 있고 ‘소년이 온다’는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를 않는다. 춘향전이나 황순원의 소나기, 호손의 큰바위 얼굴을 가르쳤던 나의 의식구조는 한강의 군데군데 어느 곳의 소설구조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기에 조금은 많이 벅차다.
솔직히 한강의 소설에 대한 대화에서 나의 짧은 지식으로는 참여가 어려워 또 다시 침묵으로 대답하여야 할 것 같다. 나의 뇌리에 남아있는 소유는 이제 거의 소진되었다. 같이 외치고 싶은 메시지가 다가온다. 조용하지만 강렬한 외침, 스웨덴 밤을 빛낸 한강의 “생명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라는 메아리가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2024년 지독한 12월의 나의 ‘침묵’과 ‘무소유’는 더 깊게 심연으로 침잠하여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소유를 탐하는 속물근성을 없애야겠다. 밖에는 더 깊고 성숙한 침묵을 바라는 차가운 바람만 거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