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벌레 대신 AI로 ‘변신’…현대적으로 극화된 카프카의 상상력
2024년 09월 27일(금) 15:25
극단 상상창꼬 ‘어느 날 아침 깨어나보니 AI로 변신해 있었다’
(사)한국연극협회 광주시지회 ‘제20회 국제평화연극제’ 일환
카프카 원작 극화, 몰입형 프로젝션 맵핑 기술 소극장에 효과적

AI로 변신한 기준(왼쪽)과 동생 현준이 문을 사이에 두고 긴장감을 자아내는 모습.

카프카는 소설 ‘변신’을 통해 삶의 부조리와 소통 단절을 그렸다. 실존은 당시나 지금이나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다.

만일 카프카가 21세기 한국에서 소설을 집필한다면 어떤 은유가 성립할까. 인공지능(AI) 기술이야말로 현대적인 모티브가 되기 충분하다. AI는 인류 문명의 이기로 발명됐으나 인간의 잘못된 도덕관으로 인해 ‘딥페이크’ 문제 등을 야기하고 있다.

이런 근미래적 불안과 디스토피아 세계관이 한 편 연극으로 초점화됐다. 지난 24일 저녁 광주 공연일번지에서 펼쳐진 극단 상상창꼬 작 ‘어느 날 아침 깨어나보니 AI로 변신해 있었다’는 카프카의 ‘변신’을 극화, 인류에게 윤리적 화두를 던지는 작품이었다. (사)한국연극협회 광주시지회(회장 고난영)가 주최하는 제20회 국제평화연극제 일환으로 무대화됐다.

공연이 시작하자 객석 앞에 드리운 대형 반투명 스크린이 이목을 끌었다. 배우들의 움직임에 따라 라이브 영상이 송출되는 프로젝션 맵핑 기술은 관객들에게 이머시브(몰입형) 감각을 선사했다.

무한히 배열된 3D 매트릭스 이미지는 손짓에 따라 이동하며 이번 공연이 무용·영상이 어우러진 융복합 창작극임을 환기했다. 로봇 분장을 한 배우는 화려한 1인무로 인트로를 장식했다.

공 씨 가족은 큰아들 기준이 AI로 변한 뒤 저마다 AI 작곡, 주식 데이터 분석, 인공지능 의족 등 도움을 받는다.
줄거리 자체는 한 줄 로그라인으로 집약될 만큼 간명했다. “어느 날 아침, 공 씨 가족은 큰아들 기준(강주성 분)이 AI가 된 것을 보고,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삶에 적응하지만 점차 불만을 느끼면서 갈등을 빚는다”는 것. 단출한 서사지만 공연미학을 더하는 디테일은 클리셰를 피하게 했다.

먼저 작품은 스크린, 창문, 문 등 미장센 활용을 통해 공연예술의 시공간적 한계를 극복했다. 소극장 특성상 장막 전환 시 세트 재배열이 어렵지만, 이 같은 난점은 ‘문’, ‘창문’ 위치를 바꿔 관객들에게 새로운 공간감을 제시하는 것으로 해결됐다.

아크로바틱한 퍼포먼스와 풍자적 과장이 돋보이는 오브제는 공연의 격을 더했다.

배우들은 책상 위를 구르거나 침대에서 점프하는 등 고난도 동작을 보여줬다. 작은 실수도 있었으나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다만 흔들리는 ‘철제문’은 맥거핀(줄거리와 관련 없으나 중요한 것으로 위장하는 트릭)이 아니라면 보수가 필요해보였다. 현준(장세현)이 문에 매달리는 장면에서 연기보다 흔들림에 눈길이 더 갔다.

극장 내 소품들은 현실과 몽상의 구분을 모호하게 했다. 네 개 다리 축이 잘려나가 불균형하게 기운 의자, 바퀴를 달고 굴러다니는 탁상은 조형적 왜곡으로 실재의 경계를 혼동하게 했다.

SF, 현실참여극을 표방하는 작품이지만 주인공 기준이 죽는 씬, AI가 인류를 습격하며 섬뜩한 미소를 짓는 장면은 나름의 서스펜스를 남겼다. 주연 배우 강주성과 장세현의 감정 연기도 몰입감을 더했다.

광주연극협회가 오는 28일까지 ‘제20회 국제평화연극제’를 빛고을시민문화관, 예술극장통 등에서 연다. 행사 일환으로 지난 24일 공연일번지에서 펼쳐진 연극 ‘어느 날 아침 깨어나보니 AI로 변신해 있었다’ 공연 장면. <광주연극협회 제공>
초연 당시부터 제기됐던 에필로그에 대한 고민은 더 필요해 보였다. 카프카 원작을 ‘존중’하다 발생한 아쉬움일 수 있으나, 개작을 거치면 대중성과 어느 정도 타협할 수 있다.

가령 원작에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몸에 박혀 썩어들어가는 그레고르를 뒤로, 가족들이 전차를 타고 교외로 향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를 오마주한 연극은 가족들이 짐을 꾸리고 무대 뒤편으로 떠나는 모습으로 결말짓는다. 죽었던 기준이 일어나 문 너머 빛으로 나아가는 장면은 허무주의를 벗어난 새로운 기제였다.

그럼에도 죽음 이후 극적 긴장감이 다소 와해된 점은 아쉽다. 초반 이후 줄곧 뒤편에 배치됐던 프로젝션을 전방으로 끌어와 중후반 이후 다시 몰입감을 선사하는 방법 등이 떠올랐다.

가족들이 홀연히 떠나버리는 서사 구조도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다소 급작스러운 피날레는 공씨 일가가 개심했는지 판단 여부를 관객들에게 미룬다. 줄곧 가족들에게 시달렸던 주인공이기에 대미에서 고통이 승화되는 전개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울러 ‘AI에 대한 경각심’이란 주제의식은 잘 전해졌으나 원작 너머의 무언가가 더 있었으면 싶다. 대학로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변신’ 레퍼토리도 대동소이한 결말을 차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기술과 무용적 요소가 적절하게 어우러진 점은 이번 작품만의 변별성이다.

한편 국제평화연극제는 빛고을시민문화관, 예술극장 통, 공연일번지 등에서 오는 28일까지 열리고 있다.

/최류빈 기자 rub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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