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언어와 교육의 본질 - 강정희 전 국어 교사
2024년 09월 02일(월) 22:00
학교 00, 여기서 00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터이다. 이 단어를 밝혀 쓰고 싶지 않다. 이것은 학교에 너무 많다. 매우 많거나 무척 많은 게 아니라, 너무 많다. 현수막에 쓰여 교문과 담장에 떡하니 걸려있고, 현관 입간판에도 번듯하게 적혀있다. 복도와 교실 게시판에는 정복 차림 경찰관 사진과 함께 포스터로 붙어있다. 이제 이 단어는 학교와 찰싹 붙어서 한 단어가 되어버렸다.

줄여서 2음절로 말하면 더욱 가슴이 답답해지며 호흡곤란이 올 지경이다. 사나운 파열음으로 시작하는 이 단어는 우리 아이들의 보드라운 뇌에 깊이 새겨져 있으리라. 잊으면 안 되는 중요한 단어라고 가슴에 품고 매일 살아가고 있으리라.

‘흰곰 효과’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이론을 읽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지 않으려면 먼저 그것을 떠올려야 한단다.

학교에서는 00을 예방하고 경계하기 위해 이 단어로 온갖 활동과 행사를 한다. 강사 초청특강을 하고 4행시와 6행시 짓기 대회를 연다. 아이들이 이 단어를 크게 쓴 어깨띠를 몸에 두르고 작은 손으로 현수막을 붙들고 피켓을 흔들며 사진을 찍는다. ‘장난 씨앗이 점점 자라 커다란 00 나무가 된다’는 우수상 수상작 표어가 전광판에 24시간 붉은 글자로 지나가며 캄캄한 운동장을 밝힌다.

아이들에게 좋은 것을 주자. 그 여린 마음에 다정하고 고운 말들을 담아주자. 제비꽃 수선화, 뭉게구름 산들바람 보슬비 시냇물, 느티나무와 능수버들…, 소리 내어 말하고 듣기만 해도 마음이 순해지는 이런 말들을 품고 살게 하자. 꾀꼬리 동고비 동박새, 이런 새 이름도 알려주자. 우리가 하는 말 듣는 말은 마음에 남고 몸에 스며들고야 마는 것이니.

예방, 미리 막다. 학교에는 또한 ‘예방’이 많다. 자살 흡연 음주 약물 인터넷중독 성00 학대…, 아이들에게 오지 못하도록 미리 막아야 하는 것들이다. 이런 단어들 역시 교정의 현수막과 학교 누리집에 종종 등장한다. 현수막을 걸고 소리 높여 외쳐대면 정말 예방이 되는지 궁금하다. ‘인성교육을 강화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인성이 강화되는지 궁금하다.

이런 구호와 다짐 대신, 아이들과 뒷동산을 산책하겠습니다, 마주 앉아 거문고와 대금을 들으며 하루 한 잔 차를 마시겠습니다, 윤동주와 백석의 시를 읽어보겠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말은 소리 높여 외칠 필요가 없다. 그냥 가만히 속삭이면 된다. 그냥 말없이 하면 되는 일이다. 놀이 이야기 예술 여행…. 상상만 해도 재미나고 흥이 나는 일들을 아이들과 함께하면, 막아내야 할 것들은 애쓰지 않아도 절로 멀어질 터이다.

친구 우정 다정 생명 건강 존중, 이런 단어를 불러내 아이들에게 돌려주자. 하지만 이런 단어마저도 필요하지 않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사랑을 하고, 인성이라는 단어 없이 인성을 다듬고, 교육이라는 말조차도 하지 말고 교육하자.

언젠가 교무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선생님이 두툼한 인쇄물을 나눠준다. 지인이 대학원 논문을 쓰는데, 설문 통계가 필요하다고 부탁을 받았단다. 응답자를 위한 작은 선물도 들어있다. 옆자리 샘이 답을 적다가 문득 묻는다.

“우리가 전문직은 아니지?”

설문은 응답자의 성별 연령대 근무지에 이어서 전문직인가를 묻고 있었다. 다른 샘이 알려준다.

“응, 전문직은 교육청 장학사잖아.”

(교육청에 ‘교육 전문직’이라는 직책이 있다. 일정 자격과 점수를 가진 교사들이 시험을 보고 장학사가 되어 교육청으로 간다.) ‘예, 아니오’의 작은 네모 앞에서 우리는 한참 머뭇거렸다. 사전을 찾아본다.

‘전문직: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이 필요한 직업’

아이들의 여러 면모를 이해하고, 그들에게 말을 걸고, 책을 권하고, 조언을 주는 일을 하는 교사, 아이들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교사가 전문직이 아니라니. 아이들 곁을 지키는 교사를 소외시키는 이런 직책명, 괜찮은가.

호모 로켄스, 인간은 언어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언어로 정교하게 사유하고, 언어가 우리의 사고와 삶을 정의한다. 학교도 회사도 사회도 언어로 직조된 유기체다. 학교의 언어를 새겨보는 것은 교육과 삶의 본질을 다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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