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발(銀髮)의 목소리 - 성진기 전남대 명예교수·철학
2024년 09월 02일(월) 00:00 가가
내키지 않게 거울 앞에 선다. 세상에 둘도 없는 내가 나를 향해 절망스러운 얼굴을 내민다. 이런저런 권리와 시효가 지났고, 유용한 생물학적 힘도 밑바닥을 친다. 가끔 ‘노인문제’라는 말을 들으면 의기소침해진다. 세상이 노인들 때문에 성가신 모양이다. 지하철 운영 적자가 공짜 승객인 노인들 탓으로 보는 것 같고.
하지만 현대의 노인들은 많은 기회를 양보하고 산다. 특히 한국인들은 그 양보 대부분이 자발적이다. 대부분 부모 또는 윗사람에 해당하는 노인들은 자신들의 빈궁을 불사한다. 예외야 있겠지만 과거 우리의 어른들은 교육 경험과 무관하게 삶의 지혜가 깊었다고 생각한다. 우린 오랜 세월 ‘어른의 말씀’에 권위를 부여했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 아버지의 말씀을 진중하게 간직하는 우리였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규범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사회는 선대가 물려주는 부동산엔 신경을 곤두세우나 ‘말씀’엔 아랑곳 하지 않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가 부유한 나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행복도는 낮고, 자살률이 높다고 한다. 이 아이러니는 감당하기 힘든 비극이다.
한국을 두고 ‘헬조선’이라고도 칭할 때 우리가 지옥에 살고 있음을 말한다. 배는 부른데 머리가 비었거나 정신이 썩었음에 대한 자조다. 이런 판국을 뒤집고 바꿀 누가 거기 없을까? 양도 질도 뒤지지 않는 노령의 사람들을 일깨우자는 생각이다.
어른의 종말 현상은 가정을 벗어나 사회 전체로 확산된 느낌이다. 선생님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많은 조직에 장교는 안 보이고 졸병만 득실대는 인상이다. 지도자들이 깃발을 흔들지만 모범에 실패해 선한 바람을 일으키지 못한다. 이러고 보면 위로부터의 모범이 빈곤하고, 밑으로부터의 불경이 창궐한 사회가 우리의 현주소 같아 심기 불편하다.
한국의 대표적 지성인의 하나였던 이어령 교수의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의 몇 구절을 빌어 와야겠다. 이어령은 “스승이란 무엇인가” 자문한다. 삶의 이유와 목적이 궁금한 사람에게 또 고독하고 외로울 때 길을 일러줄 수 있는 자가 스승일 거라는 생각을 편다. 죽음의 강을 건널 때 겁먹고 급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지혜를 주는 일 또한 선생의 임무로 본다. 다분히 철학적 명제인데, 이제 우리 사회 많은 영역에 철학적 척도가 고려되어야 한다.
이어 이어령은 죽음을 알면 삶의 이치를 터득한다고 생각한 끝에 죽음을 얘기한다. 인간은 사는 대로 죽는다는 견해는 보편화 돼 있다. “내가 느끼는 죽음은 마른 대지를 적시는 소낙비나 조용히 떨어지는 단풍잎이에요. 때가 되었구나. 죽음의 계절이 오고 있구나. 그러니 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나는 돌려주려고 한다.” 암 투병 중에 쓴 고백인데 소박하고 진솔한, 그리고 통이 큰 감정에 호감이 간다.
인간의 머리카락 변색 현상은 쇠락이 아닌 내적 성숙이기도 하다. 덜 익은 푸른 과일은 무르익으면 노랗게 색깔의 변환을 실현한다. 공자는 사람이 나이가 70여에 이르면 자기 마음이 하늘의 뜻에 배치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시력과 무관하게 인생의 깊이를 통찰하는 안목이 작동한다. 질풍노도의 혼란도 평정을 얻는다.
그러나 그저 노인이면 다 되는 일은 아니다. 현대의 노인은 ‘나 때’ 이야기로 어른 노릇을 할 수 없다. 노인들이 보편적으로 허용될만한 자기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인생이 무엇인지, 사람이 어째야 하는지 노인 자신의 살아갈 시간의 조련사가 되어야 한다. 문전에 다가온 죽음 공부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 은발들이 가져야 할 자존적 감정을 부탁하고 싶다. 불치 판정을 받은 뒤 스스로 작심한 대로 죽음을 집행한 스코트 니어링은 “젊은이는 매력적이지만 노인은 눈부시다”라고 말했다. 우리 모두 눈부신 노인으로 살기로 하면, 세상에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지 않을까.
한국산학협동연구원이 20여 년 넘게 열심히 펴내고 있는 그들의 기관지 ‘키우리’에, 우리 가까이 계시는 어른들이요, 삶의 모범자들의 말씀을 받아 공동체의 지혜를 모색하는 ‘銀髮 칼럼’ 페이지를 만들기로 했다. 이 글은 나는 완벽한데 다른 사람들, 나 밖의 세상이 온통 문제라는 지적을 노리는 글이 아니다. 이미 노령에 편입된 사람이지만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언가를 조력하고 싶은 조바심의 표출이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 아버지의 말씀을 진중하게 간직하는 우리였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규범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사회는 선대가 물려주는 부동산엔 신경을 곤두세우나 ‘말씀’엔 아랑곳 하지 않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가 부유한 나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행복도는 낮고, 자살률이 높다고 한다. 이 아이러니는 감당하기 힘든 비극이다.
한국의 대표적 지성인의 하나였던 이어령 교수의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의 몇 구절을 빌어 와야겠다. 이어령은 “스승이란 무엇인가” 자문한다. 삶의 이유와 목적이 궁금한 사람에게 또 고독하고 외로울 때 길을 일러줄 수 있는 자가 스승일 거라는 생각을 편다. 죽음의 강을 건널 때 겁먹고 급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지혜를 주는 일 또한 선생의 임무로 본다. 다분히 철학적 명제인데, 이제 우리 사회 많은 영역에 철학적 척도가 고려되어야 한다.
이어 이어령은 죽음을 알면 삶의 이치를 터득한다고 생각한 끝에 죽음을 얘기한다. 인간은 사는 대로 죽는다는 견해는 보편화 돼 있다. “내가 느끼는 죽음은 마른 대지를 적시는 소낙비나 조용히 떨어지는 단풍잎이에요. 때가 되었구나. 죽음의 계절이 오고 있구나. 그러니 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나는 돌려주려고 한다.” 암 투병 중에 쓴 고백인데 소박하고 진솔한, 그리고 통이 큰 감정에 호감이 간다.
인간의 머리카락 변색 현상은 쇠락이 아닌 내적 성숙이기도 하다. 덜 익은 푸른 과일은 무르익으면 노랗게 색깔의 변환을 실현한다. 공자는 사람이 나이가 70여에 이르면 자기 마음이 하늘의 뜻에 배치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시력과 무관하게 인생의 깊이를 통찰하는 안목이 작동한다. 질풍노도의 혼란도 평정을 얻는다.
그러나 그저 노인이면 다 되는 일은 아니다. 현대의 노인은 ‘나 때’ 이야기로 어른 노릇을 할 수 없다. 노인들이 보편적으로 허용될만한 자기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인생이 무엇인지, 사람이 어째야 하는지 노인 자신의 살아갈 시간의 조련사가 되어야 한다. 문전에 다가온 죽음 공부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 은발들이 가져야 할 자존적 감정을 부탁하고 싶다. 불치 판정을 받은 뒤 스스로 작심한 대로 죽음을 집행한 스코트 니어링은 “젊은이는 매력적이지만 노인은 눈부시다”라고 말했다. 우리 모두 눈부신 노인으로 살기로 하면, 세상에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지 않을까.
한국산학협동연구원이 20여 년 넘게 열심히 펴내고 있는 그들의 기관지 ‘키우리’에, 우리 가까이 계시는 어른들이요, 삶의 모범자들의 말씀을 받아 공동체의 지혜를 모색하는 ‘銀髮 칼럼’ 페이지를 만들기로 했다. 이 글은 나는 완벽한데 다른 사람들, 나 밖의 세상이 온통 문제라는 지적을 노리는 글이 아니다. 이미 노령에 편입된 사람이지만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언가를 조력하고 싶은 조바심의 표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