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 누구도 아니다 - 명혜영 광주시민인문학 커뮤니티 대표
2024년 08월 25일(일) 21:30 가가
한국어에는 매우 다양한 색채를 띤 ‘우리’라는 말이 있다. 몇 가지 쓰임새를 알아보면, ‘나의’ 대신 쓰이는 소속이나 소유를 나타내는 ‘우리’, 예를 들어 “우리 회사는 이번에 큰 프로젝트를 맡았어.”, “우리 엄마는 요리를 잘해.” 등등.
두 번째로 한국의 것을 뜻하는 ‘우리’가 있다, ‘우리정부, 순우리말’ 등이 그것. 여기에 친근감을 나타내는 “우리 강아지”, 포괄적 의미의 ‘우리나라’, ‘우리 국민’ 등등 다양하다.
이렇듯 ‘우리’는 한국인의 다양한 감정을 담아 발화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마뜩지 않은 쓰임새는 ‘협동이나 공동체를 강조할 때’의 쓰임새이다. “우리 같이 저녁 준비하자.”, “우리 팀은 이번 경기를 꼭 이길 거야.” 가족 버전은 “우리 아빠는 정말 재미있으셔.” 친구 버전 또한 “우리 친구들이랑 여행 가기로 했어.” 여기에 조직과 국가 버전까지의 예를 들면, “우리 학교는 역사 깊은 곳이야.”, “우리 국민들은 항상 단결해.” 등등. 그런데, 이런 ‘친근감과 공동체 의식’을 나타내는 단어인 ‘우리’가 ‘개인’ 중시의 시대정신에 역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 공익방송이라는 명목 아래 자주 흘러나오는 ‘우리’의 쓰임새 또한 그렇다. 세 가지 버전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다문화1 이주배경 청소년 버전 광고 대화’를 소개한다.
#첫 번째, 17살 모히브의 친구 승원
(승원: 모히브요? 농구 진짜 잘하죠. 근데 전 못 넘어요. 모히브: 뭐래∼, 내가 너보다 슛은 잘 쏴.)
#두 번째, 17살 카리나의 친구 하늘
(하늘: 애, 매운 거 진짜 잘 먹어요. 어쩔 땐 저보다 더 잘 먹는다니까요. 안 맵냐? 카리나: 전혀∼.)
#세 번째, 15살 김윤수의 친구 민승
(민승: 윤수 다른 점이요? 뭐 있냐? 김윤수: 글쎄∼. 민승: 아∼, 우정이 남다르죠. 제일 친하거든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가 친구라는 사실! 우리는 모두 우리!”
각자 생김새가 다른 일명 ‘다문화’ 아이들을 정주민인 한국인이 평가(?)하는 30초짜리 공익광고.
위의 대화에서 ‘우리’의 쓰임새는 ‘공동체’의 일원, ‘친근감’으로 볼 수 있다. 그게 뭐가 잘못되었나?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광고는 분명 반쪽짜리다. 모히브가 ‘슛을 잘 넣는다는 것’, 카리나가 ‘한국음식에 저항감이 없다는 것’, 김윤수의 ‘우정’ 등 각자의 개성(다른 점)이 부각되기보다, 그들의 감성을 ‘우리’라는 공동체 안으로 끌어들여, 몰개성화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만한 정주민 시점의 ‘동화’와 ‘권위’를 뒤집어 쓴, 콜로니얼리즘의 시대착오적 발상이라 아니 할 수 없겠다. 따라서 개인의 특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에피소드가 개발되어져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모히브는 농구를 잘해요’ 대신 ‘모히브는 농구를 잘해요. 그리고 그는 그의 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와 같이 개성을 강조할 수 있다.
위의 대화 속 거슬리는 단어는 또 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친구라는 사실”이라 외치는, 한국식 ‘친구’ 문화다. 이 역시 뭐가 문제인가 할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특장인 프라이버시가 침해당하는, 거리감 제로인 친구문화는 자칫 인권침해를 야기할 수 있다. 한국식 친구문화는 이를 당연시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조장하는 측면이 있다. 살아보면 알겠지만, 관계는 거리다. 개인정보 말고도 나의 신체를 거리낌 없이 터치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는 ‘친구’문화는 한마디로 구시대적 정서다.
개인 존중 시대에 걸맞게 이제는 오롯이 나만의 감성으로 채워진 세계에서 호흡하고, 필요할 경우 기꺼이 ‘선으로 이어지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라는 단어에 갇히지 않고, 각자의 이름으로 개성을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고, 또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이렇듯 ‘우리’는 한국인의 다양한 감정을 담아 발화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마뜩지 않은 쓰임새는 ‘협동이나 공동체를 강조할 때’의 쓰임새이다. “우리 같이 저녁 준비하자.”, “우리 팀은 이번 경기를 꼭 이길 거야.” 가족 버전은 “우리 아빠는 정말 재미있으셔.” 친구 버전 또한 “우리 친구들이랑 여행 가기로 했어.” 여기에 조직과 국가 버전까지의 예를 들면, “우리 학교는 역사 깊은 곳이야.”, “우리 국민들은 항상 단결해.” 등등. 그런데, 이런 ‘친근감과 공동체 의식’을 나타내는 단어인 ‘우리’가 ‘개인’ 중시의 시대정신에 역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승원: 모히브요? 농구 진짜 잘하죠. 근데 전 못 넘어요. 모히브: 뭐래∼, 내가 너보다 슛은 잘 쏴.)
#두 번째, 17살 카리나의 친구 하늘
(하늘: 애, 매운 거 진짜 잘 먹어요. 어쩔 땐 저보다 더 잘 먹는다니까요. 안 맵냐? 카리나: 전혀∼.)
#세 번째, 15살 김윤수의 친구 민승
(민승: 윤수 다른 점이요? 뭐 있냐? 김윤수: 글쎄∼. 민승: 아∼, 우정이 남다르죠. 제일 친하거든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가 친구라는 사실! 우리는 모두 우리!”
각자 생김새가 다른 일명 ‘다문화’ 아이들을 정주민인 한국인이 평가(?)하는 30초짜리 공익광고.
위의 대화에서 ‘우리’의 쓰임새는 ‘공동체’의 일원, ‘친근감’으로 볼 수 있다. 그게 뭐가 잘못되었나?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광고는 분명 반쪽짜리다. 모히브가 ‘슛을 잘 넣는다는 것’, 카리나가 ‘한국음식에 저항감이 없다는 것’, 김윤수의 ‘우정’ 등 각자의 개성(다른 점)이 부각되기보다, 그들의 감성을 ‘우리’라는 공동체 안으로 끌어들여, 몰개성화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만한 정주민 시점의 ‘동화’와 ‘권위’를 뒤집어 쓴, 콜로니얼리즘의 시대착오적 발상이라 아니 할 수 없겠다. 따라서 개인의 특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에피소드가 개발되어져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모히브는 농구를 잘해요’ 대신 ‘모히브는 농구를 잘해요. 그리고 그는 그의 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와 같이 개성을 강조할 수 있다.
위의 대화 속 거슬리는 단어는 또 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친구라는 사실”이라 외치는, 한국식 ‘친구’ 문화다. 이 역시 뭐가 문제인가 할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특장인 프라이버시가 침해당하는, 거리감 제로인 친구문화는 자칫 인권침해를 야기할 수 있다. 한국식 친구문화는 이를 당연시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조장하는 측면이 있다. 살아보면 알겠지만, 관계는 거리다. 개인정보 말고도 나의 신체를 거리낌 없이 터치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는 ‘친구’문화는 한마디로 구시대적 정서다.
개인 존중 시대에 걸맞게 이제는 오롯이 나만의 감성으로 채워진 세계에서 호흡하고, 필요할 경우 기꺼이 ‘선으로 이어지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라는 단어에 갇히지 않고, 각자의 이름으로 개성을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고, 또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