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의 ‘우리지역 우리식물’] 나무가 전하는 시원함, 내소사 전나무숲길
2024년 08월 21일(수) 22:00
모두에게 그렇듯 여름은 내게도 고된 계절이다. 오늘도 햇볕이 내리쬐는 정원 한가운데에서 무궁화를 관찰했다. 선명하게도 파란 하늘 아래 핀 무궁화 꽃을 그리는 일은 상상만으로 꽤 낭만적일 것 같지만, 종일 무궁화 곁에서 더위에 진땀을 빼다 보면 비로소 낭만은 환상이라는 걸 깨닫는다.

무궁화를 관찰하다 머리가 너무 뜨거울 땐 근처 그늘이 있는 나무를 찾는다. 비술나무, 복자기나무, 느티나무 아래에 잠시 앉아 미리 챙겨온 얼음 물을 들이키는 것만으로 좀 살 것만 같다. 에어컨을 튼 실내의 쾌적함에 비할 순 없지만, 거대한 나무 그늘은 주로 밖에 있는 나만의 힐링 공간이다.

물론 여름마다 늘 뙤약볕 아래에서 식물을 관찰하는 것은 아니다. 거대한 침엽수를 그릴 때는 그다지 더운 날씨를 실감하지 못했다.

식물 이름을 떠올릴 때, 게다가 그 식물이 내가 그림 그린 식물일 때엔 그 식물을 관찰하고 그리던 당시의 온도, 냄새 같은 게 식물명과 함께 연상된다. 여름에 그렸던 식물들에게서는 당시의 무덥고 습한 공기, 내리쬐는 햇볕, 그 아래에서 찌푸린 내 얼굴 같은 게 함께 떠오르지만, 전나무를 떠올릴 때엔 뜨거운 공기 속 내 몸에 닿은 옅은 시원한 바람, 청량한 냄새, 묘하게 좋았던 기분이 느껴진다.

10여 년 전 우리나라의 구과식물 50여 종을 그렸는데, 내가 그린 나무 중에는 전나무가 있었다. 마침 내가 당시 일하던 광릉숲에 오래된 전나무 군락이 있어 전나무를 그리기 위해 여름 내내 그 숲을 찾았다. 키가 수십 미터 되는 나무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나보다 큰 전지가위가 필요했다. 노트, 펜, 채집봉투 따위와 함께 들고 한여름 오전마다 숲을 오갔다. 가는 길은 더웠지만 막상 전나무 숲 입구에 다다르면 선선한 공기가 맴돌았다. 잎이 가지마다 빼곡히 들어선 전나무는 저 위에서 나를 위해 햇빛과 더운 공기를 막아주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전나무 숲을 빠져나오면 다시 뜨거운 여름이 계속됐다.

전나무에게선 청량하고 시원한 향기도 났다. 이 향기의 정체는 피톤치드. 외부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내뿜는 물질이다. 식물에서 나는 냄새는 개체마다 그 강도가 천차만별이다. 나는 도시의 전나무에게서 숲의 것과 같은 청량한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다.

광릉에서 맡은 전나무의 상쾌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던 곳은 부안의 내소사였다. 내소사 일주문에서 사천왕문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700여 그루의 드높은 전나무가 양옆으로 줄지어 서있다. 키가 워낙 큰데다 가지에 달린 바늘잎이 어찌나 많은지 하늘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전나무가 들어선 길에는 짙은 그늘이 깔려 있었다. 많은 이들이 여름엔 숲보다는 바다라고 말하지만, 거대한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에 오면 여름이야말로 숲의 청량함을 느끼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란 걸 깨닫게 된다.

실제로 나무는 증산작용을 통해 주변 기온을 낮추고, 직사광선을 직접 차단하는 효과가 탁월하다. 2017년 산림청에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가로수는 평균 2.5도의 온도 저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내가 그늘 아래에서 느낀 시원함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셈이다.

그래서인지 내소사를 떠올릴 때면 절에서 나는 향냄새보다는 내소사를 오가던 길목 전나무 숲의 시원한 기운이 연상된다.

전나무는 크리스마스트리의 원형이다. 수형이 유독 아름다워 오래전부터 전나무속 식물들은 퍼(fir)라는 이름으로 크리스마스트리로서 유통되었다. 매년 도심의 수많은 백화점과 쇼핑몰에서 화려하게 장식한 전나무를 보지만, 눈 쌓인 겨울 내소사의 전나무 풍경을 본 후로는 도시의 트리 장식이 왠지 시시하게 느껴졌다. 자연이 자연 그 자체로서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은 절대적인 진리다.

내소사 경내 등에 걸린 소원들을 훑다 전나무 숲을 통해 절을 빠져나왔다. 도시에 있다 보면 문명의 편리함, 자극적인 콘텐츠, 대박이라고도 부르는 횡재를 꿈꾸는 일에 익숙해지곤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경내 등에 쓴 소원은 가족의 행복, 무병장수와 같이 아주 원초적이며 소박한 바람이었다. 전나무 숲을 지나오며 생각했다. 나 또한 나무 그늘 아래의 시원함에 만족하는 이 마음으로 내게 주어진 여름을 나고 싶다고 말이다.

<식물세밀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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