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의 ‘우리지역 우리식물’] 런던의 약모밀, 황방산의 약모밀
2024년 07월 17일(수) 22:00
영국 런던에서 이 글을 쓴다. 오늘은 첼시피직가든에 다녀왔다. 이곳은 1673년 설립 이래로 350여 년간 약용식물을 연구, 수집, 전시해온 식물원이다. 식물원에는 영국을 비롯해 유럽에서 이용되어온 허브식물과 약용식물 그리고 독성식물이 식재되어 있다.

식물원을 한 바퀴 돌던 중 코끝에서 낯익은 냄새가 났다. 습한 날씨에 나는 한국 장마 냄새일 거라 생각하고 이내 가던 길을 가던 중, 정원 깊숙이 들어갈수록 한국에서 맡았던 익숙한 생선 비린내가 난다는 걸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늘 한 켠에 네 장의 흰 포엽을 가진 꽃차례가 보였다. 그것은 약모밀이었다. 런던에 오기 전까지 한국에서 매일 만나던 식물이었는데, 낯선 땅에서 다시 이들을 만나니 반가운 마음에 옅은 웃음이 났다. 낯설게만 느껴졌던 식물원이 갑자기 편안해지고 익숙하게 느껴졌다.

어릴 적부터 약모밀은 내게 익숙한 식물이었다. 내 아버지는 매년 마당의 작은 텃밭에 채소와 화훼류를 심었는데, 그 식물 목록에는 언제나 약모밀이 있었다. 아버지는 한여름이면 무성해진 잎을 수확해 머리에 바를 약을 만들었다. 약모밀은 피부와 머릿결을 곱게 만드는 데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다.

아버지가 약모밀을 만지고 집에 들어온 날은 그에게서 시큼한 생선 비린내가 났다. 나는 그 냄새가 싫었다. 그런데 런던에 와서까지 그 냄새를 맡게 된 것이다.

약모밀은 ‘잎이 메밀을 닮은 약’을 뜻한다. 어두운 그늘에 주로 분포하며 일본에서는 잡초로 여길 정도로 번식력이 강하다. 이들의 강한 번식력의 힘은 뿌리줄기에 있다. 뿌리줄기가 옆으로 뻗어나가며 땅을 뒤덮는다.

언젠가 일본 여행 중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피해자의 인터뷰가 실린 잡지를 읽은 적이 있다. 폐허가 된 땅, 약조차 구할 수 없던 시대에 중학생이던 인터뷰이는 주변에 나는 약모밀 잎을 말려 달인 물을 매일 먹고 몸을 회복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고름이 난 상처에 생 약모밀 잎을 찧어 발라주었다고도 한다. 폭격 피해자들은 하나 같이 약모밀에 대한 고마운 추억을 안고 있다.

일본 민간요법에서 약모밀은 몸의 독소를 제거하고 상처에 바르면 고름이 빠지는 효과가 있다고 여긴다. 실제로 약모밀은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이후 폐허가 된 땅에 가장 빨리 피어난 풀로 알려진다. 약모밀의 강한 생명력이 인간도 살린 셈이다.

나에게 약모밀은 너무나 익숙한 식물이기에, 이들을 특별히 아름답거나 이색적이라 느꼈던 적은 없다. 그런데 4년 전 이맘때의 계절, 전주 황방산에 오르다 산 중턱에서 약모밀 꽃이 피어난 군락을 봤다. 그 모습은 산수국 혹은 찔레꽃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산에서 만난 약모밀에서는 화단의 것보다 더욱 짙은 비린내가 났다.

약모밀은 우리나라에는 약초 재배 목적으로 도입되어 한때 울릉도에서만 분포했기에 울릉도 특산물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점점 자생지를 넓혀가고 있다.

약모밀은 전체를 약으로 쓴다. 보통은 꽃이 피면 뜯어 말려, 이것을 치질, 자궁염, 이뇨제 그리고 무좀이나 옻오른 데와 같이 피부 관리가 필요할 때 쓴다. 중국에서는 열매를 우려서 차로 마신다고도 한다. 열매는 꽃차례 형태에서 크게 변하진 않아 우리 눈에 잘 띄진 않지만 겨울까지 남아 있다.

이맘때 약모밀을 본 사람들은 네 장의 흰 잎을 꽃잎이라 생각하지만, 이것은 꽃차례를 감싸는 포엽이다. 꽃차례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네 장의 포엽이 꽃차례 주변에서 매개 동물을 불러들인다.

첼시피직가든의 약모밀은 화단 바깥까지 번식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꽃이 지는 중이지만, 이곳의 약모밀은 꽃이 만개중이었다. 약모밀은 늦봄부터 초여름까지 꽃을 피운다.

나는 지금껏 약모밀 냄새를 좋아한 적이 없다. 그동안 약모밀을 세 번이나 관찰해 그렸지만 관찰 후 이내 손을 닦기 일쑤였다. 그런데 첼시피직가든에서 맡은 약모밀 냄새는 반갑고도 향기롭게 느껴졌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건 일시적이며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이 멀리까지 와서야 깨닫는다.

그렇게 나는 약모밀을 사랑하기로 했다.

<식물세밀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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