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까지 알까 - 고성혁 시인
2024년 05월 29일(수) 00:00 가가
“동생 목소리 듣고 ㅈㅏㅍ어서 전화했네” 라며 웃던 누님이 채 두 시간도 되지 않아 “자네 화순 집으로 내려가고 ㅈㅏㅍ은디 안 되것는가?” 라고 울먹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손주새끼들하고 항꾼에 못 살겠다는 것이었다. 누님에게 치매가 온 것이다. 어린 시절, 먹을 것이 없는 가족을 위해 스스로 남의집살이를 갔던 누님이었다. 대학 하나 못 보내면서 뭐 하러 낳았냐고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았다는 소식에 천리 먼 길을 내려와 이 못난 놈! 이라며 내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던 누님이었다. 누님은 그때 남의 집 단칸방에서 조카 다섯을 건사하면서 먹고 살기 위해 날마다 가방 꼬다리를 두드려야 했다. 고백하건대 나는 그 찬물 바가지를 얻어맞고 사람이 되었다. 누님 나이 올해 팔십 오세, 치매가 올 나이이기도 했지만 누님의 한 평생을 돌아보니 가슴이 아렸다.
인생이란 이리 불공평한 것인가. 고통스런 어머니와 누님의 삶, 그리고 해거름 같은 나의 삶. 그런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어머니를 내 곁으로 이장하기로 했다. 가신 지 이십 년이 넘었으니 이제 이승과 저승의 구분을 넘어 아주 자연으로 돌아가시도록 하는 것, 그게 내 마지막 할 일이었다. 파묘하고 어머니의 뼈를 거두었다. 수습한 뼈를 쇠 양동이에 넣고 불붙여 태우고 부수고 빻고. 하지만 불편한 내 심사와 달리 일하는 사람들의 손길은 무심하기만 했다. 어머니의 뼈를 거칠게 태우고 부수는 걸 보며 내 작별의 마음이 상처를 입었다.
그러다 잉어 떼를 본 것이다. 동네 앞을 굽이쳐 흐르는 지석강가였다. 강둑을 걷고 있는데 강물에서 연거푸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강가를 내려다보니 물풀이 우묵하게 자란, 강물이 휘돌아 물살이 느리게 흐르는 곳에서 커다란 잉어들이 파닥이고 있었다. 사십 센티는 좋이 될 것 같은 커다란 잉어들이 일시에 강어귀를 비틀고 흔들어 풀섶이 떠오르고 흙탕물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잉어들의 산란 장면이었다. 시공간 따위를 넘어 근원으로서 자연의 섭리에 따라 잉태되고 소멸되는 생명의 계승. 부곡다리 밑 강물에는 더러 커다란 잉어들이 새카만 그림자처럼 몰려다니기도 했다. 지금 착란한 알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부곡다리 근처를 유유히 헤엄칠 것이다….
그 생각은 불쑥 며칠 전의 병아리들로 이어졌다. 어미가 스무 하루를 품은 날, 몇 번이나 둥지를 들여다봐도 움직임이 없더니 다음 날 두어 녀석이 어미 품 안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것들을 지키고자 한껏 날개를 세우는 어미닭의 모성과 녀석들의 순정한 눈빛이라니. 가슴에 환한 불이 들어왔다. 그 다음 날 아침 둥지 속에서 열한 마리의 알록달록하고 울긋불긋하고 검고 흰 병아리들이 어미 품속에서, 깃털 속에서, 날갯죽지 안에서 나를 바라봤다. 어떤 놈은 제 어미 위로 훌쩍 뛰어오르고, 어떤 놈은 어미와 입을 맞추고, 어떤 놈은 제 어미의 깃털에 숨고. 하지만 며칠 뒤 그 아름답고 순정한 풍경 뒤의 숨겨진 진실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깨어나지 못한 나머지 네 개의 알 속에도 다 된 병아리들의 형용이 주검으로 담겨 있었던 것이다. 먼저 태어난 놈들은 사흘을 넘기게 되면 부족한 영양공급 때문에 죽고 말았다. 늦된 놈들을 버리고 먼저 태어난 더 많은 병아리를 품은 어미닭의 선택을 생각하자 알 것 같았다.
생명은 이렇게 이어지는 것이었다. 자연의 섭리는 어디서건 거침없이 흐르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지금껏 세상이 이어질 수 있었다. 인간이란 그 안의 한갓 티끌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밀물과 썰물처럼, 오름과 내림처럼 우리 삶과 죽음 또한 세상을 위한 자연스러운 작동 기제였으므로 어머니도 누님도 그리고 나도 세상 안의 한갓 티끌로서 그럭저럭 살아갈 일이었다. 그 안의 탐욕과 재물과 명예가 무엇이랴. 성냄과 어리석음은 또 무엇이랴.
첨벙대는 잉어 떼를 보다 눈을 돌리니 주름살투성이 아내가 강물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인연도 세상의 이치 안에 있었다. 생판 모른 사람으로 만나 그럭저럭 부대끼며 살아온 사십 년. 부모 역할도 자식 된 도리도 모르고, 이웃으로서 동료로서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살아왔음에도 우리는 또 얼마간 우리 앞에 드리운 알지 못할 섭리대로 살아갈 것이었다. 도대체 우리 삶은 어디로 흐르고 어디쯤에서 꺾일까. 굽이치는 강물을 바라보다 정지아 작가의 소설 제목을 떠올렸다.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
그 생각은 불쑥 며칠 전의 병아리들로 이어졌다. 어미가 스무 하루를 품은 날, 몇 번이나 둥지를 들여다봐도 움직임이 없더니 다음 날 두어 녀석이 어미 품 안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것들을 지키고자 한껏 날개를 세우는 어미닭의 모성과 녀석들의 순정한 눈빛이라니. 가슴에 환한 불이 들어왔다. 그 다음 날 아침 둥지 속에서 열한 마리의 알록달록하고 울긋불긋하고 검고 흰 병아리들이 어미 품속에서, 깃털 속에서, 날갯죽지 안에서 나를 바라봤다. 어떤 놈은 제 어미 위로 훌쩍 뛰어오르고, 어떤 놈은 어미와 입을 맞추고, 어떤 놈은 제 어미의 깃털에 숨고. 하지만 며칠 뒤 그 아름답고 순정한 풍경 뒤의 숨겨진 진실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깨어나지 못한 나머지 네 개의 알 속에도 다 된 병아리들의 형용이 주검으로 담겨 있었던 것이다. 먼저 태어난 놈들은 사흘을 넘기게 되면 부족한 영양공급 때문에 죽고 말았다. 늦된 놈들을 버리고 먼저 태어난 더 많은 병아리를 품은 어미닭의 선택을 생각하자 알 것 같았다.
생명은 이렇게 이어지는 것이었다. 자연의 섭리는 어디서건 거침없이 흐르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지금껏 세상이 이어질 수 있었다. 인간이란 그 안의 한갓 티끌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밀물과 썰물처럼, 오름과 내림처럼 우리 삶과 죽음 또한 세상을 위한 자연스러운 작동 기제였으므로 어머니도 누님도 그리고 나도 세상 안의 한갓 티끌로서 그럭저럭 살아갈 일이었다. 그 안의 탐욕과 재물과 명예가 무엇이랴. 성냄과 어리석음은 또 무엇이랴.
첨벙대는 잉어 떼를 보다 눈을 돌리니 주름살투성이 아내가 강물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인연도 세상의 이치 안에 있었다. 생판 모른 사람으로 만나 그럭저럭 부대끼며 살아온 사십 년. 부모 역할도 자식 된 도리도 모르고, 이웃으로서 동료로서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살아왔음에도 우리는 또 얼마간 우리 앞에 드리운 알지 못할 섭리대로 살아갈 것이었다. 도대체 우리 삶은 어디로 흐르고 어디쯤에서 꺾일까. 굽이치는 강물을 바라보다 정지아 작가의 소설 제목을 떠올렸다.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