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의 ‘소설처럼’] 불멸의 갈등 - 전하영 소설집 ‘시차와 시대착오’
2024년 04월 25일(목) 00:00 가가
이제 ‘세대 차이’라는 말은 옛말처럼 들린다. 대신 요즘에는 ‘세대 갈등’이라는 말이 더 익숙하다. 차이를 넘으면 화합이 될 줄 알았건만, 차이 다음에는 갈등이 있었던 셈이다. 세대 갈등은 선거철이 되면 더 극명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22대 총선에서 60대 이상 세대는 (호남을 제외하고) 현재 여당을 지지하는 성향을 보여줬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여당은 더 크게 참패했을 것이다. 달리 말해 해당 세대는 정치적으로 다른 세대와 확연히 다른 인식 체계를 갖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심화되면 그들은 더 극단적인 확증 편향에 빠질 수도 있다. 그들 사이의 단체 카톡, 그들 사이의 유튜브, 그들 사이의 가짜 뉴스가 그 예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꼭 노년 세대만은 아니다. 근래 내 주변의 40대를 만나면 20대 걱정을 한다. 우리 부서 신입 사원이 이렇게 말했다. 옆 팀 3년 차 직원이 그만둘 때 이렇게 행동했다. 요즘 친구들은 야근할 줄 모른다…… 등등. 반대로 20대가 바라보는 40대는 어떻겠는가? 역시 말을 좀 줄여야 하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지역별로 나뉘는 투표 성향과 그 전후의 갈등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숙제로 여겨졌지만 세대 간의 차이와 갈등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 같다. 노년은 장년을, 장년은 청년을, 청년은 소년을 무시한다. 소년은 청년을, 청년은 장년을, 장년은 노년을 멸시한다. 무시와 멸시는 튼튼한 수레바퀴처럼 돌고 도는 듯하다. 수레바퀴 아래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수레바퀴 아래에는 물론 실제 삶이 있다. 선거 결과와 정치 체계라는 관념에서 노년 또는 청년은 반대파의 일원으로, 추상적 수치의 한 묶음으로, 빨강이면 빨강이고 파랑이면 파랑인 이념의 결사체가 존재할 것이지만 일상에서의 세대는 그저 한 사람으로 존재할 뿐이다. 1번을 찍은 60대 남자가 우리 아파트 단지의 친절한 경비원일 수 있다. 2번을 찍은 30대 여성은 아파트 경비 일을 하는 아버지에게 안부 문자를 보내는 퇴근길의 직장인일 수 있다.
전하영 소설집 ‘시차와 시대착오’는 문학이 예술을 서사화할 수 있는 최대치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소설속 인물은 여러 예술 분야의 아티스트거나 해당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고, 그들에게는 예술이 아닌 그들의 삶이 있다. 예술과 삶의 전후를 살피며 그 순서를 재배치하는 것, 그리하여 ‘시차’와 ‘시대착오’를 이야기에 부려놓는 것이 전하영 소설의 미덕일 것이다. 한편 소설집의 표제작 ‘시차와 시대착오’에는 예술을 지탱하는 삶 중에, 가족이라는 시스템에서 불멸하고야 세대 갈등 혹은 차이를 그린다. ‘이명식’은 영등포에 자기 소유의 상가 건물(그러나 공실이 많은)이 있는 중산층 노년이지만 하나뿐인 딸 ‘이미루’를 떠올리면 한숨부터 나온다. 그는 성실하게 약속을 지키고, 가족을 위해 희생했으며, 앞을 보고 열심히 사는 삶을 지극히 당연하게 여긴다. 딸 이미루는 다르다. 이미루는 예술 분야 석사 학위가 있고 삼청동 갤리러에서 일하며 노원구 아파트에서 혼자 아니, 고양이와 산다. 둘에게는 엄연한 시차가 존재한다. 그리고 둘에게는 공히 시대착오적인 면이 있다.
둘은 서로를 이해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소설은 둘의 이야기에 특별한 접점을 두지 않고 진행되는데 특히 이미루의 일상에 이명식은 틈입하지 못한다. 이미루는 구조적 문제에 봉착해 더 나아가지 못한 예술가로서 삶, 자존감이 떨어진 채 만나는 옛 인연이 더 중한 문제이다. 이명식은 몇 달째 공실인 채로 방치된 상가와 결혼할 생각은 영 없어 보이고 유랑하듯 사는 딸이 문제이다.
둘의 문제는 하나의 문제인가? 둘은 같은 시대에서 어떤 착오로 다른 시대를 꿈꾸는 걸까? 소설은 마지막 장면에 와서 약간의 틈을 보여준다. 악성 사기에 휘말릴 뻔한 아버지를 돕는 딸, 딸에게 위안을 느끼며 이제야 조금 기댈 마음을 갖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독자는 세대의 시차를 극복하고, 착오를 인정하며 아름다운 화해에 이르는 모습을 상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고, 소설은 현실을 배반하지 않는 편을 택한다. 시차와 시대착오는 불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
둘은 서로를 이해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소설은 둘의 이야기에 특별한 접점을 두지 않고 진행되는데 특히 이미루의 일상에 이명식은 틈입하지 못한다. 이미루는 구조적 문제에 봉착해 더 나아가지 못한 예술가로서 삶, 자존감이 떨어진 채 만나는 옛 인연이 더 중한 문제이다. 이명식은 몇 달째 공실인 채로 방치된 상가와 결혼할 생각은 영 없어 보이고 유랑하듯 사는 딸이 문제이다.
둘의 문제는 하나의 문제인가? 둘은 같은 시대에서 어떤 착오로 다른 시대를 꿈꾸는 걸까? 소설은 마지막 장면에 와서 약간의 틈을 보여준다. 악성 사기에 휘말릴 뻔한 아버지를 돕는 딸, 딸에게 위안을 느끼며 이제야 조금 기댈 마음을 갖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독자는 세대의 시차를 극복하고, 착오를 인정하며 아름다운 화해에 이르는 모습을 상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고, 소설은 현실을 배반하지 않는 편을 택한다. 시차와 시대착오는 불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