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우중 낙화 -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2024년 04월 21일(일) 22:30 가가
산벚나무 만개한 오솔길로 상여가 나간다.
봄비인지 꽃비인지 가랑가랑 는개 속에 꾹 눌린 울음이 자국마다 구슬프다. 꽃도 상여도 없는 초행길, 달랑 보자기에 싸인 항아리 하나, 맏손주 두 손에 들려 간다. 그 뒤로 서른 남짓 가족들이 초록 오솔길을 따른다. 같이 웃고 같이 울며 밥을 나눴을 사람들이다. 화창한 봄날의 축제, 이별 잔치, 달에서 나고 만월을 살다가 달나라로 다시 돌아가는 게 삶이라더니, 항아리에서 태어나고 항아리를 끼고 살며 항아리로 들어가는 인생인가 보다.
달포 전, 달아실 할머니가 오셨다. 감기로 며칠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해보니 생강이 얼어 죽고 말았단다. 소문 듣고 왔다며 생강 종자 좀 달라고 하신다. 올해 94세, 노구에도 소녀처럼 웃으셨다. 그렇게 정정하시던 분이, 씨앗을 빌려달라던 분이 왜 씨앗 받아 가겠다는 그 약속을 잊고서 지금 저리 바삐 산으로 가시는가.
“이리 꽃피는 계절에 가니 좋겠네.”
“이 꽃 보고자 겨우내 견디어 내더니, 꽃 피니 가는 건 무순 심보인고?”
마지막 고별을 하러 나온 마을 사람들, 그 등 뒤로 능주 할머니의 한숨 소리. 자기도 빨리 데려가라는 한숨이 먹구름보다 더 묵직하다. 얼마 전에 화장실에서 쓰러져 ‘엉금엉금’ 회관까지 기어 나온 분이다.
“저리 꽃잎은 톡톡 잘도 떨어지는데, 이놈의 목숨은 이다지 구차스럽게 안 떨어지는지…”
할머니의 푸념이 넋두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사람을 희롱하는 듯 하롱하롱 떨어지는 낙화, 우두망찰 바라보는 표정 없는 노인의 눈빛.
“나는 지금 갑니다. 내년 봄에 또 찾아와 활짝 필 터이니…”
바람에 실려 가면서 나불대는 꽃잎 소리가 아련히 들리는 듯하다. 무연히 강 건너편으로 날아가는 꽃들을 본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노인들에게 낙화는 너무 잔인하게 화려하다.
봄비를 맞으며 산에서 내려온다.
지난 겨울이었지 싶다. 마을회관에 나온 달아실 할머니는 유독 자식 자랑을 자주 했다.
“자식 자랑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소. 할매 자식들 본지 벌써 몇 년째요?”
사람들은 달아실 할머니가 자식들 자랑한 이유를 안다. 벌써 몇 년째 고향에 발길을 끊고 있다. 딱히 당신이 잘못한 일도 없는데 자식들은 어찌 된 까닭인지 모두 외면했다. 그건 애써 자기 슬픔을 짓누르려는 당신만의 슬픈 흐느낌인지 모른다.
명절 때, 간혹 오긴 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시간에 왔다가 누가 도착할라치면 서둘러 떠났다. 할머니는 다른 자식들처럼 함께 오순도순 사는 모습 한번 보는 게 소원이라며 떠나는 자식들마다 손을 잡고 애원했다.
“하루만 더 묵었다 가그라이.”
무릇 여섯 남매를 힘들게 키우다 보니 똑같이 키울 순 없었던 모양이다. 형편이 풀리면 고등학교, 그리고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녀석은 대학까지 보냈단다. 하지만 누군 어쩔 수 없어 중학교까지만 보냈다. 제 운명이고 제 복이려니 했는데, 그게 화근이 된 모양이다.
부모는 열 자식을 키우는데, 열 자식은 부모 한 명을 모시지 못한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비가 훑고 지나간 산중에는 산안개가 무겁게 내려앉는다. 무덤가에는 연분홍 진달래가 가신 이의 한처럼 붉게 피어있다.
“그 자식들, 애미 애를 그렇게 태웠으니, 이제 속이 시원할까잉?”
마을 할머니들의 한숨이 연이어 터져 나온다. 덧없이 흘러가는 구름 같은 인생, 며칠 피지 못하고 떨어지는 꽃잎 같은 삶, 이별을 재촉하듯 이슬비 흩날리는데, 허공을 맴돌던 꽃잎 하나 떨어진다. 달아실 할머니 무덤 위로, 그렇게 삶을 덮고 또 죽음을 덮는다. 그 위로 지금 촉촉하게 게으른 눈물, 봄비가 내리는 중이다.
봄비인지 꽃비인지 가랑가랑 는개 속에 꾹 눌린 울음이 자국마다 구슬프다. 꽃도 상여도 없는 초행길, 달랑 보자기에 싸인 항아리 하나, 맏손주 두 손에 들려 간다. 그 뒤로 서른 남짓 가족들이 초록 오솔길을 따른다. 같이 웃고 같이 울며 밥을 나눴을 사람들이다. 화창한 봄날의 축제, 이별 잔치, 달에서 나고 만월을 살다가 달나라로 다시 돌아가는 게 삶이라더니, 항아리에서 태어나고 항아리를 끼고 살며 항아리로 들어가는 인생인가 보다.
“이 꽃 보고자 겨우내 견디어 내더니, 꽃 피니 가는 건 무순 심보인고?”
마지막 고별을 하러 나온 마을 사람들, 그 등 뒤로 능주 할머니의 한숨 소리. 자기도 빨리 데려가라는 한숨이 먹구름보다 더 묵직하다. 얼마 전에 화장실에서 쓰러져 ‘엉금엉금’ 회관까지 기어 나온 분이다.
할머니의 푸념이 넋두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사람을 희롱하는 듯 하롱하롱 떨어지는 낙화, 우두망찰 바라보는 표정 없는 노인의 눈빛.
“나는 지금 갑니다. 내년 봄에 또 찾아와 활짝 필 터이니…”
바람에 실려 가면서 나불대는 꽃잎 소리가 아련히 들리는 듯하다. 무연히 강 건너편으로 날아가는 꽃들을 본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노인들에게 낙화는 너무 잔인하게 화려하다.
봄비를 맞으며 산에서 내려온다.
지난 겨울이었지 싶다. 마을회관에 나온 달아실 할머니는 유독 자식 자랑을 자주 했다.
“자식 자랑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소. 할매 자식들 본지 벌써 몇 년째요?”
사람들은 달아실 할머니가 자식들 자랑한 이유를 안다. 벌써 몇 년째 고향에 발길을 끊고 있다. 딱히 당신이 잘못한 일도 없는데 자식들은 어찌 된 까닭인지 모두 외면했다. 그건 애써 자기 슬픔을 짓누르려는 당신만의 슬픈 흐느낌인지 모른다.
명절 때, 간혹 오긴 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시간에 왔다가 누가 도착할라치면 서둘러 떠났다. 할머니는 다른 자식들처럼 함께 오순도순 사는 모습 한번 보는 게 소원이라며 떠나는 자식들마다 손을 잡고 애원했다.
“하루만 더 묵었다 가그라이.”
무릇 여섯 남매를 힘들게 키우다 보니 똑같이 키울 순 없었던 모양이다. 형편이 풀리면 고등학교, 그리고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녀석은 대학까지 보냈단다. 하지만 누군 어쩔 수 없어 중학교까지만 보냈다. 제 운명이고 제 복이려니 했는데, 그게 화근이 된 모양이다.
부모는 열 자식을 키우는데, 열 자식은 부모 한 명을 모시지 못한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비가 훑고 지나간 산중에는 산안개가 무겁게 내려앉는다. 무덤가에는 연분홍 진달래가 가신 이의 한처럼 붉게 피어있다.
“그 자식들, 애미 애를 그렇게 태웠으니, 이제 속이 시원할까잉?”
마을 할머니들의 한숨이 연이어 터져 나온다. 덧없이 흘러가는 구름 같은 인생, 며칠 피지 못하고 떨어지는 꽃잎 같은 삶, 이별을 재촉하듯 이슬비 흩날리는데, 허공을 맴돌던 꽃잎 하나 떨어진다. 달아실 할머니 무덤 위로, 그렇게 삶을 덮고 또 죽음을 덮는다. 그 위로 지금 촉촉하게 게으른 눈물, 봄비가 내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