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의 ‘밥 먹고 합시다’] 이탈리아와 한국의 진짜 공통점
2024년 04월 11일(목) 00:00
예전에는 동네마다 기름장수가 돌아다녔다. 머리에 기름병이 든 함지를 이고 기름 사라고 외쳤다. 남자는 못 보았고 전부 여자 행상이었다. 똬리를 머리에 올리고, 기름병이 잔뜩 든 함지를 이고 다니면 목에 하중이 크게 걸렸을 것이다. 땀 흘리며 비틀거리며 걷던 행상 모습이 기억난다.

그때 국민들이 먹던 기름은 몇 종류가 안 되었다. 참기름, 들기름, 땅콩기름 정도였다. 동물성으로는 돼지기름을 꽤 많이 먹었고. 땅콩기름은 낙화생(落花生·땅콩의 한자어)유라고도 불렀다. 땅콩기름 맛의 기억은 희미하다. 그다지 많이 먹는 기름은 아니었다. 이미 ‘식용유’라고 부르는 대량 생산 기름이 팔리고 있던 때라 50년 전이면 기름장수도 시들해질 시기였다. 한데 대기업은 콩기름이나 팔았지 참기름, 들기름은 여전히 시장 단골집이나 시골에서 짜다 먹는 기름이었다. 시장에 가면 기름집이 많았다. 당시에 기름은 비싼 것이어서 작은 용량도 흔했다. 따로 기름병이라고 만들어서 나오는 게 없어서 시중의 다른 병을 가져다가 기름 넣어 팔았다. 박카스, 소주병이 가장 많이 쓰였다. 지금도 그런 문화가 남아 있는데 기름은 시골의 고향에서 가져다 먹는 관습이 있었다. 기름은 귀하고 소중한 것이니, 어머니가 짜서 도시의 자식에게 주는 것이었다. 명절에 고생고생해서 고향에 가면 노모가 주섬주섬 뭘 싸주게 마련인데 기름이 빠지지 않았다. 참깨 농사를 지어 장에 나가 손수 기름집에 맡겨서 짜온 기름병은 신문지와 비닐로 꽁꽁 막았고, 그걸 헐어서 먹을 때 기름이 흘러 절어든 신문지를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나던 것이었다. 다들 그런 기억이 있을 것 같다.

좀 다른 얘기인데 이탈리아에서 요리사로 몇 해 살 때 자취를 했다. 중부의 제법 큰 도시여서 남부지역에서 공부하러 유학 온 대학생들과 집을 나눠서 같이 썼다. 이른바 쉐어 하우스, 즉 누군가 집 하나를 빌어서 방을 쪼개 재임대를 하는 형태였다. 보통 대여섯 명의 대학생들과 같이 살았다. 흥미로운 건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방학 기간에는 모두들 남부의 고향에 갔다. 시칠리아, 칼라브리아 같은 곳이었다. 그들이 돌아와서 짐꾸러미를 풀어놓으면 전부 올리브유를 꺼내는 게 아닌가. 과자며 말린 고기와 생선, 빵 같은 것도 있었지만 올리브유가 제일 귀중한 선물이었다. 고향의 부모님이 농사 지어 직접 짠 기름을, 도회 나가 공부하는 자식에게 바리바리 싸주는 것이었다. 나는 타향살이하면서 그들이 꺼내놓은 올리브유병을 보고는 눈물이 찔끔 났다. 어쩌면 그리도 한국과 같은 것인지. 한국과 이탈리아가 비슷하다고들 하는데, 아마도 시골집에서 기름 얻어오는 게 제일 똑같은 관습 아닌가 싶다. 그들이 가져오는 올리브유는 우리로 치면 어머니표 참기름과 같은 존재였다.

큰 마트나 백화점에 가보시라. 기름 진열대를 보면 놀랍게도 수많은 종의 기름을 한국인이 먹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참기름, 들기름 같은 오랜 전통의 기름도 다양해져서 ‘냉압착’이니 ‘국산’이니 하여 품질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카놀라유며 올리브유는 이미 주요 식용유가 되었다. 올리브유는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호주 등 전세계를 망라하여 수입되어 팔린다. 한 병에 수십만 원 하는 고급품도 제법 팔린다. 누가 그걸 사다먹나 싶을 정도로 비싼 것들이다. 몇 해 전부터는 트러플기름 붐이 일어서 젊은이들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식당마다 그 기름을 뿌려 내는 요리가 인기가 끌더니 요새는 떡볶이에 넣어서도 먹는단다. 적어도 내가 알기론 트러플오일이 우리나라처럼 인기 있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호두기름에 아마씨기름, 아보카도기름 같은 것도 보인다. 특별히 맛보다는 건강 때문에 수입해 먹는 기름이라고 한다. 아마도 기름 종류만 따지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종을 먹는 나라가 한국이 아닐까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메가가 어떠니 불포화지방산이 어떠니’ 하는 건강 프로그램과 유튜브에 관심이 많아서일까.

그 옛날 힘들게 머리에 기름을 이고 다니던 행상 중에는 내 외숙모도 있었다. 남편(외숙)은 민주화운동으로 경찰의 요주의 감시자가 되어 직업도 없었고 그 집 생계가 오직 외숙모의 기름병에 달려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외숙모가 최근 93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기름 행상은 사라졌지만 그 외숙모의 수고를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삼가 평안하시기를 빈다.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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