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의 ‘소설처럼’] 윤달의 읽을거리 - 전욱진 ‘선릉과 정릉’
2024년 02월 29일(목) 00:00 가가
시간 참 빠르다는 말이 참 우습다. 양자역학이니 현대물리학이니 하는 걸 따지지 않고 그저 삿된 인간의 세계에서 시간은 언제나 정확했고, 누구에게나 공평했는데,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며 언제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감회에 젖는다. 그리고 말한다. 시간 언제 이렇게 되었지, 그날이 엊그제였던 것 같은데….
연말의 북적거림과 연초의 설렘이 모두 지나간 요즈음이면 시간의 흐름이 더 가파르게 느껴진다. 이런저런 문서에 아직도 2023이라 쓰고 황급히 지우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새해가 벌써 60일이나 지난 것이다. 지난 두 달 무엇을 하며 지냈나? 신년에 세운 계획과 각오는 아직 유지하는지? 대답할 말이 없어 다시 읊조리는 것이다. 거참, 시간 한번 빠르네….
그나마 올해는 다행이라 할 수 있는데, 윤달이 끼어 2월이 하루 더 많다.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2월 29일이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하루는 시간의 흐름을 더 재촉하는 것 같다. 군대에 있을 때, 제대를 한 달 앞뒀는데 하필 그달이 윤달이라 잦은 짜증을 냈던 선임이 떠오른다. 20년도 더 지난 일인데, 아니 벌써 이렇게나 시간이 지났다니 우습다. 4년 전 윤달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급격하게 퍼지기 시작한 시기다. 검색해보니 마스크 대란이 있었고 확진자 수가 1000명이 넘었다는 소식에 모두 놀랐으며 특히 대구의 위기감이 깊었다. 그리고 지금은… 많은 게 바뀌었고, 그 전으로 돌아간 것도 그 전과 달라진 것도 많다. 많은 이가 희생한 채로 시간은 묵묵히 흘러 오늘까지 왔다.
시간에 종점이 있을까? 시간은 순환버스와 같은 것일까? 시간이라는 버스에서 내릴 방법은, 그러니까 벨을 누르고 하차하는 방법은 죽음을 통한 존재의 소멸밖에는 없는 것 같다. 내가 내려도, 버스는 다시 가던 길을 갈 것이다. 누군가를 태우고, 누군가를 내릴 것이다.
전욱진 시인의 ‘선릉과 정릉’은 2월에, 그중에서도 윤달에 읽기 좋은 책이다. 이 책은 ‘시의적절’이라는 시리즈 중 한 권인데, 한 명의 시인이 한 달 동안 하루에 하나의 글을 읽을거리로 제공한다. 1월은 김민정 시인의 ‘읽을, 거리’가 출간되었으며 2월은 전욱진 시인의 ‘선릉과 정릉’인 것이다. 2월은 윤달이라 하루가 더 많으니 운 좋게도 그의 글을 한 편 더 볼 수 있게 됐다. 거기에 제목에서부터 큰 무덤이 둘이나 나오니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도 좋다.
무덤을 제목으로 하고 산문의 큰 줄기는 ‘종점 일기’로 잡고 있으니 이 또한 시인의 직관으로서 가능한 연결이라 하겠다. 시인은 “종종 아무 버스에나 올라 노선 종점까지 간다”고 하는데, 이는 시간을 ‘죽이는’ 시적 행위일 것이다. 시간에 쫓기니 시간이 빠르고 시간에 휘둘리니 시간에 겁박당하는 게 아닐까? 시인은 시간의 더께에서 홀연한 듯, 양자역학의 세계에라도 들어선 듯 같은 시간선 안의 타인과 자신을 다음처럼 겹쳐보기도 한다.
“어느 가을, 나와 운명이 엇갈린 한 사람과 나를 포개어본다.” 어느 날 시인은 버스에서 지난날의 인연을 마주한다. 그와의 기억은 사뭇 드라마틱하다. 쓸쓸하고 외롭다. 다만 시간이 이렇게 지나버렸기에 시인은 이렇게도 쓸 수 있다. “그 이름을 다시 부르는 여름/ 나를 보며 여전하다, 말하는 사람” 시인은 지난 시간을 붙잡아 여기에 흩뿌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에게, 그의 글을 읽는 우리에게 시간은 더 이상 빠르기만 한 것은 아니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시간의 온순하고 겸손한 주인이 된다.
‘선릉과 정릉’은 하루에 한 편씩 읽기 좋은 책이다. 시와 동시와 편지와 에세이와 동화가 알맞게 배치되었다. ‘시의적절’ 시리즈의 책들이 아마도 모두 그러할 텐데, 하루에 한 편씩 읽고 월말을 맞이하면 우리는 또 이렇게 말하게 될 것 같은 것이다. 아니 벌써 한 달이 다 갔어? 시간 참…. 이 말이 우습고 이 말이 사무치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간다. 나를 태운 버스가 어딘지 모를 목적지로 핸들을 돌리고 있다.
<시인>
그나마 올해는 다행이라 할 수 있는데, 윤달이 끼어 2월이 하루 더 많다.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2월 29일이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하루는 시간의 흐름을 더 재촉하는 것 같다. 군대에 있을 때, 제대를 한 달 앞뒀는데 하필 그달이 윤달이라 잦은 짜증을 냈던 선임이 떠오른다. 20년도 더 지난 일인데, 아니 벌써 이렇게나 시간이 지났다니 우습다. 4년 전 윤달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급격하게 퍼지기 시작한 시기다. 검색해보니 마스크 대란이 있었고 확진자 수가 1000명이 넘었다는 소식에 모두 놀랐으며 특히 대구의 위기감이 깊었다. 그리고 지금은… 많은 게 바뀌었고, 그 전으로 돌아간 것도 그 전과 달라진 것도 많다. 많은 이가 희생한 채로 시간은 묵묵히 흘러 오늘까지 왔다.
전욱진 시인의 ‘선릉과 정릉’은 2월에, 그중에서도 윤달에 읽기 좋은 책이다. 이 책은 ‘시의적절’이라는 시리즈 중 한 권인데, 한 명의 시인이 한 달 동안 하루에 하나의 글을 읽을거리로 제공한다. 1월은 김민정 시인의 ‘읽을, 거리’가 출간되었으며 2월은 전욱진 시인의 ‘선릉과 정릉’인 것이다. 2월은 윤달이라 하루가 더 많으니 운 좋게도 그의 글을 한 편 더 볼 수 있게 됐다. 거기에 제목에서부터 큰 무덤이 둘이나 나오니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도 좋다.
무덤을 제목으로 하고 산문의 큰 줄기는 ‘종점 일기’로 잡고 있으니 이 또한 시인의 직관으로서 가능한 연결이라 하겠다. 시인은 “종종 아무 버스에나 올라 노선 종점까지 간다”고 하는데, 이는 시간을 ‘죽이는’ 시적 행위일 것이다. 시간에 쫓기니 시간이 빠르고 시간에 휘둘리니 시간에 겁박당하는 게 아닐까? 시인은 시간의 더께에서 홀연한 듯, 양자역학의 세계에라도 들어선 듯 같은 시간선 안의 타인과 자신을 다음처럼 겹쳐보기도 한다.
“어느 가을, 나와 운명이 엇갈린 한 사람과 나를 포개어본다.” 어느 날 시인은 버스에서 지난날의 인연을 마주한다. 그와의 기억은 사뭇 드라마틱하다. 쓸쓸하고 외롭다. 다만 시간이 이렇게 지나버렸기에 시인은 이렇게도 쓸 수 있다. “그 이름을 다시 부르는 여름/ 나를 보며 여전하다, 말하는 사람” 시인은 지난 시간을 붙잡아 여기에 흩뿌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에게, 그의 글을 읽는 우리에게 시간은 더 이상 빠르기만 한 것은 아니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시간의 온순하고 겸손한 주인이 된다.
‘선릉과 정릉’은 하루에 한 편씩 읽기 좋은 책이다. 시와 동시와 편지와 에세이와 동화가 알맞게 배치되었다. ‘시의적절’ 시리즈의 책들이 아마도 모두 그러할 텐데, 하루에 한 편씩 읽고 월말을 맞이하면 우리는 또 이렇게 말하게 될 것 같은 것이다. 아니 벌써 한 달이 다 갔어? 시간 참…. 이 말이 우습고 이 말이 사무치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간다. 나를 태운 버스가 어딘지 모를 목적지로 핸들을 돌리고 있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