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의 소명 - 윤현석 정치부 부국장
2024년 02월 15일(목) 00:00
원래 초가였으나 1957년 목조 기와로 중건한 다산초당은 전남의 인기 관광지 가운데 하나다. 이번 설 연휴에도 조선 최고의 천재 가운데 한 명인 정약용이 10년간 머물렀던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꽤 있었을 것이다. 다산은 이 초가에서 제자를 길러내고 역사에 길이 남을 저서를 남겼다. 그가 평생 쓴 서적은 500여 권에, 관련 분야는 문학·예술·과학·의학·철학·정치학·지리학 등에 이른다.

27세에 문과에 급제해 정조의 개혁 정치를 뒷받침했던 그는 1800년 정조 사망 후 포항, 강진 등지에 유배되어 18년을 보냈다. 1836년 74세의 나이에 서거했는데, 사후 100년을 기념해 자손과 지식인들이 그의 저술을 엮어 1938년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로 펴냈다. 정약용은 다산(茶山)과 함께 여유당이라는 호도 즐겨썼다. ‘여유’는 신중하고 경계하라는 의미로 노자에서 인용했다고 스스로 밝혔다.

여유당전서의 제1집 제8권 시문집 인재책(人才策)에는 1790년 정조와 정약용의 문답이 담겨 있는데, 그 내용은 234년이 지난 지금도 곱씹을 만하다. 여기서 둘은 높은 벼슬아치들이 관련 분야에 전문성이나 식견 없이 ‘공밥’을 먹고, 권세와 요직을 도맡으면서도 자신의 책무가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것에 깊이 탄식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오랜 기간 한 분야에서 근무하는 하급 관리의 권력이 중해지고 간사한 속임수가 날로 심해진다고 정약용은 지적했다. 그는 백성을 위한 대책으로 관제 개혁을 통한 관직 정비, 책임제 도입, 임기 보장 후 치적·명성 평가 등을 내놓았다.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마다 인재 영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 나름 얼굴이 알려진 전문가나 이런저런 인연으로 부름에 답한 이들이 정치의 영역에 들어서고 있다. 반길 수만은 없는 것이 그동안 영입된 인재의 상당수가 소신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당내 권력구조에 적응해 줄을 서고, 어느 순간 초심을 잊고 직업 정치인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선출직 공직에 나서는 인재는 오로지 공익을 위해 뿌리 깊은 기득권을 타파하며 혁신을 주도해야 하는 소명과 책무를 갖는다. 그것이 어렵다면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한다.

/chadol@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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