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역사의 창’] 대명천지 대일천지
2024년 02월 08일(목) 00:00
‘대명천지(大明天地)에…’ 운운하는 말이 있다. 밝은 해가 뜬 환한 세상을 뜻하는 말로 알겠지만 그런 뜻이 아니다. 이 ‘명(明)자’는 ‘밝다’는 뜻이 아니라 중국 명(明:1368~1644)나라를 뜻한다. 그 의미는 “위대한 명나라가 지배하는 하늘과 땅”이라는 뜻이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할 때 이 말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조선의 숭명(崇明) 사대주의 유학자들이 매년 청에 사신을 보내는 ‘대청천지(大淸天地)’에 살면서 ‘대명천지’에 산다고 생각한 정신승리가 만든 말이다.

대명천지의 어원은 자신은 조선 임금의 신하가 아니라 명나라 임금의 신하라고 자처했던 송시열에게 있다. 그는 임진왜란 때 군사를 지원한 명의 신종(神宗)과 명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의 사당을 집 근처에 지으려고 했다. 송시열은 명의 신하이지 조선의 신하가 아니라는 논리로 집 근처에 신종·의종을 제사하는 만동묘(萬東廟)를 세우려 했으나 조선 왕실에 눈치가 보여서 만동묘를 세우지는 못했다.

숙종은 송시열과 그의 당인 서인(노론)이 조선의 신하가 아니라 명의 신하를 자처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남인가 여인 희빈 장씨가 낳은 왕자(경종)를 원자(元子)로 책봉하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반대한 송시열을 사형시킨 것은 송시열과 노론의 이런 행태에 대한 응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숙종은 다시 서인가 여인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면서 희빈 장씨를 죽이고 자신의 당적을 서인(노론)으로 자정(自定:스스로 정함)했다. 그래서 송시열의 제자 권상하가 송시열의 유언을 빙자해 숙종 43년(1717) 송시열의 집 근처인 청주 화양동에 만동묘를 세우는 것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숙종 자신이 명나라의 신하임을 자인한 셈이니 만동묘는 조선 임금보다 높은 권위를 차지했고 만동묘를 관장하는 화양동 서원은 법 위의 존재가 되었다. 화양동 서원에서 각 고을에 이른바 ‘화양묵패(華陽墨牌)’를 보내 돈을 요구하면 지방 수령들도 거부할 수 없었고, 화양동 서원에서 백성들에게 사형(私刑)을 가하면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송시열을 숭상하는 노론이 화양계곡 절벽에 ‘대명천지(大明天地) 숭정일월(崇禎日月)’이라는 글자를 새긴 것이 이른바 ‘대명천지’의 어원이었다. 숭정은 자살한 명 의종의 연호인데, 조선은 영원한 의종의 제후국이라는 뜻이었다. 노론은 심지어 조상들의 비문에까지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이라고 써서 명나라의 신하로 자처했다.

서인(노론) 사대주의의 목적은 대국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국내 정권 장악에 있었다. 사대를 명분으로 국내의 정치와 언론을 억압했다. 명을 끝까지 섬길 것 같던 노론은 일본이 부상하자 바로 말을 바꿔 타고 친일로 전향했다. 노론의 마지막 당수가 이완용이고, 일제로부터 나라 팔아먹은 댓가로 작위와 돈을 받은 76명의 조선 벼슬아치 중 대다수가 노론인 것이 이를 말해준다.

해방 후 미국과 이승만 정권이 다시 친일세력들을 중용하면서 이들은 해방 후에도 여전히 주류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정도가 심한 집단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이병도·신석호를 태두로 섬긴 역사학계다. 이들은 서론에서는 “식민사학을 극복했다”고 자화자찬하는 것으로 국민들을 속인 후 본론과 결론에서는 여지없이 식민사학을 반복하는 것으로 조선총독부 황국사관을 대한민국의 ‘정설’이자 ‘통설’로 만들었다.

노론이 이미 망한 명나라를 섬기는 ‘대명천지’를 산 것처럼 이들은 열도로 쫓겨 간 일본을 섬기는 ‘대일천지(大日天地)’를 살았다. 국고 47억 원을 들인 ‘동북아역사지도’에서 독도를 끝내 삭제한 것이나, 가야사를 유네스코 국제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하면서 전북 남원을 야마토왜의 식민지 기문국으로, 경남 합천을 임나 7국의 하나인 다라국으로 명기한 것이나, 전라도를 고대부터 야마토왜인들의 식민지로 서술한 ‘전라도천년사’ 등의 문제는 ‘대일천지’를 살고 있는 역사학자들이 붓을 잡을 경우 나타나는 반복적 행태에 불과한 것이다. <순천향대학교 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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