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의 ‘소설처럼’ ] 소설로 대신하는 진지한 대화
2024년 01월 31일(수) 22:00
샐리 루니 장편소설 ‘아름다운 세상이여, 그대는 어디에’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지 꽤 오래된 것 같다. 날씨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제 축구 경기 결과나 요즘 재미있게 보는 드라마를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분위기를 심각하게 만들지 않을 공통 관심사에 대해 이리저리 요모조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그러다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와 친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와 진지한 대화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이번 총선에 어느 당에 투표할지 말이다. 다행히 같은 당이라면 더 세밀한 대화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당의 주류를 지지하는지 비주류를 지지하는지. 진지한 대화가 협의의 정치에만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기후 위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성평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종교는 무엇인지… 등등. 우리는 이런 문제는 되도록 빼놓고 대화를 이으려 한다. 진지한 대화는 결코 좁힐 수 없는 차이를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그 차이를 발견하면, 우리는 멀어진다. 저 사람은 상종할 수 없는 사람이군. 저 인간 진짜 별로네….

‘노멀 피플’로 알려진 아일랜드 작가 샐리 루니는 지금 젊은 세대의 가치관과 삶의 태도, 그들이 처한 상황을 솔직하고 절묘하게 다뤄 젠지세대(Z세대)의 대표 작가로 평가받는다. 작가는 계급, 세대, 성별, 성적지향이 다른 인물이 갖는 다양한 의견과 감정을 대화로써 드러나게 한다. 이 소설의 두 주인공은 같은 도시의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지만, 계급적 차이가 극명하며 당연하게도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또한 다르다. 둘은 자유로운 연애 관계 혹은 족쇄와 같은 친구 관계를 유지하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서로 다른 생각을 진지한 대화로 마구 섞는다. 진지한 대화 때문에 가끔은 감정이 격해지고, 오해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기는 하지만, 그 대화를 통해 그들은 상대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대화가 더욱 전면에 나타난 소설은 ‘노멀 피플’보다 먼저 쓰인 ‘친구들과의 대화’이다. 소설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주인공 네 명은 나이와 계급, 직업과 가치관 모두 다르지만, 한 테이블에 모여 대화한다. 대화의 테이블은 그들에게 있어 삶 자체로 보인다. 테이블에서 그들은 시와 사진과 같은 예술을 논한다. 사랑을 말한다. 그들은 테이블을 좀 더 위태롭게 만들기도 한다. 격렬한 사랑을 나누고, 그만큼의 불안과 상처에 시달린다. 그것은 입체적으로 직조된 인물의 언어로 문자화된다. 대화라는 음성으로, 메일로, 편지로 그리고 무엇보다 스마트폰 채팅으로. 모든 것은 진지한 대화의 플랫폼이 되며 그 위에서 인물은 스스로를 발설하여 세계를 폭로한다. 세계의 부조리와 인간의 불안정함을 언어로 드러낸다. 요즘 소설의 통상적인 미덕으로 꼽히는 정교한 플롯, 놀라운 반전, 흥미로운 사건이 샐리 루니의 소설에서는 언어가 대체한다. 마치 대화가 소설의 본질이라는 듯이, 언어가 소설의 전부라는 듯이.

작가의 최근작 ‘아름다운 세상이여, 그대는 어디에’는 그야말로 진지한 대화의 소설이다. 마찬가지로 각기 다른 사정에 처한 인물은 끊임없이 누군가와 ‘대화’한다. 이 소설에서 샐리 루니의 인물들은 보다 더 진지해지기로 한다. 소설가인 ‘앨리스’와 작은 출판사에서 일하는 ‘펠릭스’는 메일을 통해, 전화를 통해 기나긴 대화를 이어나간다. 페미니즘과 기후위기, 계급갈등과 브랙시트, 이민자 문제와 배타주의…. 서로의 의견이 같을 리가 없는데도 둘은 모든 문제를 말하고 듣는다. 샐리 루니는 이번 작품에 이르러 대화의 소설에서 의견의 소설로 한발자국 옮기려는 듯하다. 이 소설을 읽는 우리에게도 그게 무엇이든 의견을 갖기를 요청한다. 당신은 이러한 주제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요? 하면서.

진지한 대화를 피한지 오래되었다. 소설로라도 진지한 대화를 나누면 좋겠다 싶다. 박경리의 ‘토지’에서의 대화를 읽으며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울분을 느꼈듯이,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에서의 대화를 읽으며 개발독재의 논리와 모순을 알았듯이, 대화로 무언가를 알고 싶고 그 대화에 응하고 싶다. 어쩌면 근래의 소설은 이러한 대화에 나설 용기를 조금 덜 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물들의 말은 줄어들고, 민감한 이슈에 대해서는 에둘러 말하기 일쑤다. 좋은 소설은 그럼에도 독자에게 주요한 질문을 남기겠지만, 가끔은 대놓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것이다. 그럴 때 샐리 루니의 소설은 뜨겁고 진지한 대답이 될 수 있다. 마침 소설이 묻는다. 아름다운 세상이여, 그대는 어디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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