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총 앞에 ‘부역자’ 되고…경찰 총 앞에 ‘반동’ 됐다
2024년 01월 04일(목) 19:55 가가
진실화해위,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 사연 공개…광주·전남 5건 들여다보니
빨치산에 음식 줬다고 좌익 몰려…‘남편이 경찰’ 만삭 아내 총살
빨치산 부역 자수한 일가족 몰살 당하고…예배 보던 20명 매장
빨치산에 음식 줬다고 좌익 몰려…‘남편이 경찰’ 만삭 아내 총살
빨치산 부역 자수한 일가족 몰살 당하고…예배 보던 20명 매장
한국전쟁 전후 광주·전남의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경찰 가족이라는 이유로 좌익세력에게 일가족이 몰살되기도 했고, 빨치산에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쩔수 없이 음식을 제공했다가 좌익세력으로 몰려 군경에게 총살을 당하기도 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화위)는 지난 2일 공식 홈페이지에 ‘별이 되어 빛나는 진실을 전합니다’의 제목으로 민간인희생 특별페이지를 오픈했다.
특별페이지에는 1·2기 진화위가 진실로 규명한 주요 사건 피해자들의 사연이 담겨 있다. 광주·전남의 5건등 총 37건의 사건으로 구성됐다.
지난 1949년 7월 광산군(현 광주시 광산구) 대산리 대야마을에서 면장과 이장을 하던 김씨 형제가 빨치산에게 살해된 사건을 조사하겠다던 삼도지서(광산군 삼도면) 대산출장소 경찰이 주민 중 장모씨와 김모씨 등 4명을 대산출장소로 끌고 갔다. 가족들은 한 달이 지난 8월 21일이 되서야 이들을 다시 찾을 수 있었지만 이미 숨진 후였다.
30대 농부이자 가장인 장모씨 빨치산이 마을로 내려와 밥을 해내라, 닭을 잡아라, 요구하면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다. 식량 제공을 거부했다가는 그 자리에서 총살을 당하기 때문이다.
결국 빨치산이나 경찰이나 누구든 총을 들이대는 쪽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는데도 주민들은 빨치산의 총 앞에서 부역자가 되고, 경찰의 총 앞에서 반동이 됐다.
1951년 5월 31일 광산경찰서 소속 경찰이 빨치산을 색출한다며 양동리 복만마을에 진입해 마을 사람들을 집결시켰다.
경찰은 주민 박모씨를 포함한 몇 명을 뽑아내서 몽둥이로 구타하고 코에 물을 부으며 ‘빨치산이 어디 있느냐’며 자백을 강요했다. 박씨는 고문을 견디기 힘들어 이를 면하려고 거짓말로 빨치산 위치를 이야기 했다.
그러나 경찰이 박씨를 끌고 가 확인해보니 말한 것과 달리 빨치산이 없자 박씨를 살해했다.
1950년 10월 4일 오후 신안군 임자면 진리교회 장로 이모씨의 집에서 예배가 열렸다. 그날 모인 사람은 모두 20명으로 이씨 가족 12명과 일반 신자 8명이 모였다.
좌익들은 예배를 보던 이씨의 가족들은 포승줄에 묶여 대기리 백산들로 끌려갔다. 이씨 가족은 죽창 등으로 살해당해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매장당했다.
친구 집에 가 있어 가족 한명이 길에서 울고있는 것을 발견한 좌익들은 몽둥이로 구타해 살해한 후 갯벌에 시신을 유기하기도 했다.
진리교회 사건의 희생자는 진리교회 신자 48명과 증언 함께 신자의 가족들까지 총 64명이다.
영암 학계리의 배모(여)씨는 남편 현모씨가 영암 경찰이라는 이유로 1950년 10월 2일 지방좌익들에 의해 학산면 학계리 광암마을 제정골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당시 배씨는 만삭이었다.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에 살았던 정모씨는 어머니와 고모, 출생 신고도 하지 않은 남동생 개똥이(3~4세), 할아버지를 한꺼번에 잃었다. 당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광주에 피난을 가고 없었다.
경찰이 토벌 작전을 한다고 민간인을 계속 죽이니까 모악리 주민 대부분이 산으로 피신했는데 가족들도 뒤늦게 따라 산에 올라갔다. 닷새 후 산에서 내려와 모량면 심학리 증조할머니 댁으로 피난을 갔다.
피난 온 지 하루 만에 증조할머니가 “이러다가 다 죽겠다”며 자수하라고 해서 어머니, 고모, 할아버지가 묘량지서에 가서 자수했다.
이튿날 경찰이 개똥이를 떼놓고 어른들만 “좋은 곳으로 데리고 간다”며 데리고 나가는데 개똥이가 하도 우니까 경찰이 “이놈 아깝다” 하면서 어머니의 등에 업혀 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경찰에 의해 민간인 19명과 함께 쌍운리 쌀고개(일명 옴팍골)로 끌려가 한 구덩이에 들어가서 집단 살해됐다.
/정병호 기자 jusbh@kwangju.co.kr
경찰 가족이라는 이유로 좌익세력에게 일가족이 몰살되기도 했고, 빨치산에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쩔수 없이 음식을 제공했다가 좌익세력으로 몰려 군경에게 총살을 당하기도 했다.
특별페이지에는 1·2기 진화위가 진실로 규명한 주요 사건 피해자들의 사연이 담겨 있다. 광주·전남의 5건등 총 37건의 사건으로 구성됐다.
지난 1949년 7월 광산군(현 광주시 광산구) 대산리 대야마을에서 면장과 이장을 하던 김씨 형제가 빨치산에게 살해된 사건을 조사하겠다던 삼도지서(광산군 삼도면) 대산출장소 경찰이 주민 중 장모씨와 김모씨 등 4명을 대산출장소로 끌고 갔다. 가족들은 한 달이 지난 8월 21일이 되서야 이들을 다시 찾을 수 있었지만 이미 숨진 후였다.
1951년 5월 31일 광산경찰서 소속 경찰이 빨치산을 색출한다며 양동리 복만마을에 진입해 마을 사람들을 집결시켰다.
경찰은 주민 박모씨를 포함한 몇 명을 뽑아내서 몽둥이로 구타하고 코에 물을 부으며 ‘빨치산이 어디 있느냐’며 자백을 강요했다. 박씨는 고문을 견디기 힘들어 이를 면하려고 거짓말로 빨치산 위치를 이야기 했다.
그러나 경찰이 박씨를 끌고 가 확인해보니 말한 것과 달리 빨치산이 없자 박씨를 살해했다.
1950년 10월 4일 오후 신안군 임자면 진리교회 장로 이모씨의 집에서 예배가 열렸다. 그날 모인 사람은 모두 20명으로 이씨 가족 12명과 일반 신자 8명이 모였다.
좌익들은 예배를 보던 이씨의 가족들은 포승줄에 묶여 대기리 백산들로 끌려갔다. 이씨 가족은 죽창 등으로 살해당해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매장당했다.
친구 집에 가 있어 가족 한명이 길에서 울고있는 것을 발견한 좌익들은 몽둥이로 구타해 살해한 후 갯벌에 시신을 유기하기도 했다.
진리교회 사건의 희생자는 진리교회 신자 48명과 증언 함께 신자의 가족들까지 총 64명이다.
영암 학계리의 배모(여)씨는 남편 현모씨가 영암 경찰이라는 이유로 1950년 10월 2일 지방좌익들에 의해 학산면 학계리 광암마을 제정골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당시 배씨는 만삭이었다.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에 살았던 정모씨는 어머니와 고모, 출생 신고도 하지 않은 남동생 개똥이(3~4세), 할아버지를 한꺼번에 잃었다. 당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광주에 피난을 가고 없었다.
경찰이 토벌 작전을 한다고 민간인을 계속 죽이니까 모악리 주민 대부분이 산으로 피신했는데 가족들도 뒤늦게 따라 산에 올라갔다. 닷새 후 산에서 내려와 모량면 심학리 증조할머니 댁으로 피난을 갔다.
피난 온 지 하루 만에 증조할머니가 “이러다가 다 죽겠다”며 자수하라고 해서 어머니, 고모, 할아버지가 묘량지서에 가서 자수했다.
이튿날 경찰이 개똥이를 떼놓고 어른들만 “좋은 곳으로 데리고 간다”며 데리고 나가는데 개똥이가 하도 우니까 경찰이 “이놈 아깝다” 하면서 어머니의 등에 업혀 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경찰에 의해 민간인 19명과 함께 쌍운리 쌀고개(일명 옴팍골)로 끌려가 한 구덩이에 들어가서 집단 살해됐다.
/정병호 기자 jusbh@kwangju.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