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의 ‘소설처럼’] 내일을 생각하며 - 나현정 그림책 ‘하루살이가 만난 내일’
2024년 01월 03일(수) 23:00 가가
12월 31일 밤이 다른 날 밤과 다른 게 있다면 단 하나, 카운트다운을 센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주 멀리에 로켓이라도 쏘아 올리는 양, 대통령 선거 출구 발표라도 하는 듯이, 텔레비전이든 휴대전화든 전광판이든 줄어드는 숫자를 바라보며 외친다. 십, 구, 팔…… 삼, 이, 일, 땡. 새해가 밝은 것이다.
시간은 태초부터 존재해왔겠지만, 시간을 생각하고 시간을 나누고 시간에 개념을 부여한 것은 우리 인간이다. 그러니까 2023년 12월 31일 23시 59초와 2024년 1월 1일 0시 1초의 차이는 인간에게나 유효한 것이다. 전자는 작년이고 후자는 올해다. 며칠 전까지 전자는 올해였고 후자는 내년이었다. 그 나눔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는 숫자를 세고, 새해 인사를 나눈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공동 수상을 남발하는 연말 시상식을 무료하게 보다가도 그 순간이 오면 자세를 고쳐 바로 앉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음,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군. 내일부터는 나도…….
작심삼일이라 하였으니, 각자 다졌던 새해 각오가 하나둘 흐트러지기 시작할 오늘이다. 나 또한 조금이라도 더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고자 했던 다짐을, 미약한 감기 기운을 빌미 삼아 폐기 처분했다. 그러고는 어쩔 수 없는 우울과 상념에 젖었는데, 다가오는 내일이 꼭 새해가 아니더라도 내일은 내일이고, 내일은 생애 마지막 날을 제외하고는 필히 오고야 만다는 사실에 이상한 위로를 받았다.
그것은 아마도 나현정 그림책 ‘하루살이가 만난 내일’을 읽었기 때문이리라. 주인공은 하루살이다. 하루살이는 이름처럼 하루만 살 수 있는데(연구에 따르면 하루살이는 성충으로 사는 기간이 하루나 이틀일 뿐이지 애벌레 시절부터 센다면 통상 1년 넘는 수명을 가진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한다), 하루살이가 어떻게 내일을 만난단 말인가.
하루살이가 내일을 만날 수 없다는 전제는 분명한 모순이 있다. 내일을 만날 수 있는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내일은 우리의 관념에서만 존재할 뿐, 내일이 우리 앞에 당도하는 순간 내일은 바로 오늘이 된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내일과의 만남을 기대하지만 만남은 영원히 유예되고 우리는 그저 오늘을 살아갈 뿐이다. 당신은 지금 어느 날을 살고 있는가.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일을 만나고자 하는 하루살이의 비행은 의미심장하다. 녀석은 온갖 색이 반짝거리는 바깥세상을 처음 보고, 이러한 아름다움을 하루밖에 볼 수 없음에 안타까워한다. 내일을 만날 수 있다면, 이 반짝거림을 보다 오래 볼 수 있을 텐데, 아쉬워하면서.
그림책답게 하루살이의 하루는 화사한 색감으로 이어진다. 새와 새싹, 꽃과 씨앗이 제각기 내일이 있는 곳을 일러준다. 내일은 아주 높은 곳에나 아주 낮은 곳에 있을 수도 있다 한다. 노인은 어둠 속에 있어 내일이 보이지 않는다 하고 금붕어는 좁은 곳에 갇혀 내일을 생각할 수 없다고 한다. 물결과 소녀, 애벌레와 새하얀 눈, 늑대와 고양이 모두 내일을 말한다. 마치 그들이 내일을 만난 것처럼, 내일이 무엇이라 말할 수 있다는 듯이. 하루살이는 내일을 만날 수 있을까? 하루살이의 긴 여정은 아무래도 하루만큼은 아닌 것 같다. 책의 첫장에는 꽃이 만개하는데, 말미에 이르러서는 하이얀 눈이 소복히 쌓인 것만 봐도 그렇다. 그렇다면 하루살이는 이미 내일을 만난 것이지 않은가? 그렇기도 아니기도 하겠지만 확실한 건 하루살이는 하루보다 더 살았고, 그 시간에 내일 대신 다른 존재를 만나며 내일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루살이는 춤을 춘다. 모두에게 각자의 내일이 있다고 말하며.
2024년이 되었다. 책에서 늑대가 “내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이 순간이 중요해”라고 하는데, 물론 맞는 말이지만, 이 순간을 구성하기 위해 지나쳐온 어제와 이 순간으로서 다시 만들어질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순간도 온전히 내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내일 중에 새해 첫날에 우리는 보다 더한 의미를 매긴다. 거기에 내일에 내일을 보태며 한 해를 보낸다. 새해가 밝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내일은 어떤 모양일까? 어떤 내일을 그리며 오늘을 살아야 할까? 하루살이는 마지막 춤에 앞서 ‘모두의 내일’을 그린다. 그 장면에 우리가 만나야 할 내일의 힌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시인>
하루살이가 내일을 만날 수 없다는 전제는 분명한 모순이 있다. 내일을 만날 수 있는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내일은 우리의 관념에서만 존재할 뿐, 내일이 우리 앞에 당도하는 순간 내일은 바로 오늘이 된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내일과의 만남을 기대하지만 만남은 영원히 유예되고 우리는 그저 오늘을 살아갈 뿐이다. 당신은 지금 어느 날을 살고 있는가.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일을 만나고자 하는 하루살이의 비행은 의미심장하다. 녀석은 온갖 색이 반짝거리는 바깥세상을 처음 보고, 이러한 아름다움을 하루밖에 볼 수 없음에 안타까워한다. 내일을 만날 수 있다면, 이 반짝거림을 보다 오래 볼 수 있을 텐데, 아쉬워하면서.
그림책답게 하루살이의 하루는 화사한 색감으로 이어진다. 새와 새싹, 꽃과 씨앗이 제각기 내일이 있는 곳을 일러준다. 내일은 아주 높은 곳에나 아주 낮은 곳에 있을 수도 있다 한다. 노인은 어둠 속에 있어 내일이 보이지 않는다 하고 금붕어는 좁은 곳에 갇혀 내일을 생각할 수 없다고 한다. 물결과 소녀, 애벌레와 새하얀 눈, 늑대와 고양이 모두 내일을 말한다. 마치 그들이 내일을 만난 것처럼, 내일이 무엇이라 말할 수 있다는 듯이. 하루살이는 내일을 만날 수 있을까? 하루살이의 긴 여정은 아무래도 하루만큼은 아닌 것 같다. 책의 첫장에는 꽃이 만개하는데, 말미에 이르러서는 하이얀 눈이 소복히 쌓인 것만 봐도 그렇다. 그렇다면 하루살이는 이미 내일을 만난 것이지 않은가? 그렇기도 아니기도 하겠지만 확실한 건 하루살이는 하루보다 더 살았고, 그 시간에 내일 대신 다른 존재를 만나며 내일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루살이는 춤을 춘다. 모두에게 각자의 내일이 있다고 말하며.
2024년이 되었다. 책에서 늑대가 “내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이 순간이 중요해”라고 하는데, 물론 맞는 말이지만, 이 순간을 구성하기 위해 지나쳐온 어제와 이 순간으로서 다시 만들어질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순간도 온전히 내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내일 중에 새해 첫날에 우리는 보다 더한 의미를 매긴다. 거기에 내일에 내일을 보태며 한 해를 보낸다. 새해가 밝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내일은 어떤 모양일까? 어떤 내일을 그리며 오늘을 살아야 할까? 하루살이는 마지막 춤에 앞서 ‘모두의 내일’을 그린다. 그 장면에 우리가 만나야 할 내일의 힌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