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의 ‘우리지역 우리식물’] 송곡리를 지켜주는 팽나무
2023년 12월 28일(목) 00:00 가가
어릴 적 도심에 살던 나는 농촌 할아버지댁에 가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 할아버지댁은 우리 집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었다. 할아버지댁 마을에 다다르면 차창밖으로 구멍가게와 거대한 나무가 보였는데, 이 풍경을 통해 나는 할아버지댁에 도착했음을 알아채곤 했다.
당시에는 그 나무의 이름을 몰랐으나 마을에서 만난 아주머니께서 내게 그것이 느티나무란 사실을 알려주셨다.
흐릿한 나의 기억으로, 그 느티나무는 수고 20미터가 훨씬 넘었고, 나무 아래에선 늘 마을 사람들이 바둑을 두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더는 그 마을에 갈 일이 없게 되었고, 나무에 대한 나의 기억은 희미해져갔다. 할아버지댁 마을은 해체되고, 그곳에 신도시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느티나무도, 구멍가게도, 할아버지댁 앞에 있던 사슴농장도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을이 있던 자리에는 6차선 도로가 생기고 아파트가 빼곡히 지어졌다. 어릴 적 할아버지댁 마을 풍경은 내 기억 속에만 남았으나, 가끔은 그 기억이 모두 실제가 아닌 꿈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학부에서 수목학 수업 중 하루는 정자목에 대해서 배웠다. 교수님은 여러 정자목 사진들을 보여주시며 이들은 마을 어귀에 심어진 나무,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과 같은 존재라 일러주었다. 정자목에 대한 설명을 듣던 내 머릿속에는 할아버지댁 마을을 지키던 그 느티나무가 떠올랐다. 나중이 알게 된 또 하나의 사실은 실제로 느티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정자목 수종이란 것이다.
지난 가을 신안에서의 식물 조사 여정을 마치고 목포로 향하던 중 암태도 송곡리의 도로 옆에 잠시 차를 세웠다. 그곳에 도로 위를 가리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있었기 때문이다. 차에서 내려 나무에 다가가니 수고 15미터는 훌쩍 넘어 보였다. 고개를 들어 나무를 올려다보았을 때 진한 녹색의 잎을 통해 이 나무가 팽나무임을 알 수 있었다. 마침 주위엔 팻말도 하나 있었다. 이 나무는 수령 200년으로 2009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팽나무는 느티나무와 더불어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정자목 수종 중 하나다. 수형이 아름답고 우람한 편인데다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기에 남부지역의 마을 어귀에서는 팽나무를 자주 볼 수 있다. 다만 천년을 넘게 사는 느티나무와 달리 팽나무의 수명은 수백 년 정도다.
조금은 독특한 이들 이름은 열매가 팽총의 재료로 이용되어 팽나무라 붙여졌다는 설과 ‘이삭이 패다, 꽃이 피다’라는 ’팽‘의 어원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팽나무는 가을이 시작될 즈음 둥근 열매가 열린다. 열매는 연두색에서부터 노란색, 주황색, 붉은색으로 익어가는데 나는 특히 주황빛 열매가 청록색 잎에 대비되는 순간을 좋아한다. 팽나무처럼 고운 주황빛을 띄는 열매도 잘 없다. 속명은 셀티스(Celtis) 또한 그리스어로 ‘열매가 맛있는 나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송곡리의 팽나무는 너무 울창한 나머지 2차선 도로 공중에까지 가지가 뻗어 있었다. 회갈색의 거친 수피도 눈에 띄었다. 수피를 만져보니 의외로 부드러웠다. 팽나무 아래에는 열매가 붉게 익어가는 꽝꽝나무도 보였다.
해가 질세라 다시 차에 타 섬을 빠져나왔다. 어느새 뒤에선 주황빛 노을이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천사대교를 지나 차를 세우고 다시 다리 위에 걸쳐 있는 해가 질 때까지 가만히 서서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신안은 언제나 내게 이처럼 귀한 풍경을 선물해준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이곳을 찾는 것 같다.
송곡리에는 내가 만난 보호수 팽나무 외에도 수령 200여 년이 넘는 팽나무 개체들이 남아 있다. 법적 보호를 받지 않는 이 나무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누군가 이들이 사는 땅을 지켜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백 년 된 오래된 나무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내 어릴 적 기억 속 느티나무도 진작에 보호수로 지정되었다면 혹은 마을이 신도시로 개발되지 않았다면 송곡리 팽나무처럼 오랜 시간을 간직한 모습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지금처럼 그 나무를 오래도록 떠올리고 그리워하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식물 세밀화가>
흐릿한 나의 기억으로, 그 느티나무는 수고 20미터가 훨씬 넘었고, 나무 아래에선 늘 마을 사람들이 바둑을 두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더는 그 마을에 갈 일이 없게 되었고, 나무에 대한 나의 기억은 희미해져갔다. 할아버지댁 마을은 해체되고, 그곳에 신도시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느티나무도, 구멍가게도, 할아버지댁 앞에 있던 사슴농장도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을이 있던 자리에는 6차선 도로가 생기고 아파트가 빼곡히 지어졌다. 어릴 적 할아버지댁 마을 풍경은 내 기억 속에만 남았으나, 가끔은 그 기억이 모두 실제가 아닌 꿈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팽나무는 느티나무와 더불어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정자목 수종 중 하나다. 수형이 아름답고 우람한 편인데다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기에 남부지역의 마을 어귀에서는 팽나무를 자주 볼 수 있다. 다만 천년을 넘게 사는 느티나무와 달리 팽나무의 수명은 수백 년 정도다.
조금은 독특한 이들 이름은 열매가 팽총의 재료로 이용되어 팽나무라 붙여졌다는 설과 ‘이삭이 패다, 꽃이 피다’라는 ’팽‘의 어원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팽나무는 가을이 시작될 즈음 둥근 열매가 열린다. 열매는 연두색에서부터 노란색, 주황색, 붉은색으로 익어가는데 나는 특히 주황빛 열매가 청록색 잎에 대비되는 순간을 좋아한다. 팽나무처럼 고운 주황빛을 띄는 열매도 잘 없다. 속명은 셀티스(Celtis) 또한 그리스어로 ‘열매가 맛있는 나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송곡리의 팽나무는 너무 울창한 나머지 2차선 도로 공중에까지 가지가 뻗어 있었다. 회갈색의 거친 수피도 눈에 띄었다. 수피를 만져보니 의외로 부드러웠다. 팽나무 아래에는 열매가 붉게 익어가는 꽝꽝나무도 보였다.
해가 질세라 다시 차에 타 섬을 빠져나왔다. 어느새 뒤에선 주황빛 노을이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천사대교를 지나 차를 세우고 다시 다리 위에 걸쳐 있는 해가 질 때까지 가만히 서서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신안은 언제나 내게 이처럼 귀한 풍경을 선물해준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이곳을 찾는 것 같다.
송곡리에는 내가 만난 보호수 팽나무 외에도 수령 200여 년이 넘는 팽나무 개체들이 남아 있다. 법적 보호를 받지 않는 이 나무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누군가 이들이 사는 땅을 지켜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백 년 된 오래된 나무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내 어릴 적 기억 속 느티나무도 진작에 보호수로 지정되었다면 혹은 마을이 신도시로 개발되지 않았다면 송곡리 팽나무처럼 오랜 시간을 간직한 모습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지금처럼 그 나무를 오래도록 떠올리고 그리워하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식물 세밀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