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역사의 창’] 청남(淸南)과 탁남(濁南)
2023년 12월 14일(목) 00:00 가가
서인들이 광해군을 내쫓은 1623년(계해년)의 정변을 인조반정으로 불러왔다. 반정(反正)이란 ‘잘못된 것에서 올바른 것으로 되돌아갔다’는 뜻이니 인조반정은 잘못된 광해군을 내쫓고 인조를 즉위시켜 바른 길로 되돌아갔다는 뜻이다. 왕조 교체를 ‘임금의 성을 고친다’는 뜻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고 하고 왕조는 유지하되 군주만 갈아치우는 것을 반정이라고 하는데 이는 모두 이긴 쪽에서 붙이는 용어이다.
인조반정은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은 것이 아니라 그릇된 숭명(崇明) 사대주의에서 벗어나 자주적 외교노선을 걷던 광해군을 내쫓고 숭명 사대주의로 되돌아간 ‘정변(政變)’에 불과하다. 정변이란 반란·쿠데타 등 비합법적 수단으로 기존의 정치체제를 뒤엎는 것인데, 서인들이 광해군을 내쫓은 것이 이에 해당한다. 그래서 ‘인조반정’보다는 ‘계해정변’이 더 정확한 용어가 된다.
계해정변에 대한 민심이 싸늘하자 서인들은 정변에 가담하지 않은 남인들을 관제 야당으로 끌어들여 민심을 수습했다. 그러나 남인들은 예송논쟁을 계기로 관제 야당의 틀에 갇히기를 거부하고 서인들과 정면 충돌했다. 제1차 예송논쟁은 북벌군주 효종이 재위 10년(1659) 세상을 떠나면서 발생했다. 효종 승하 때 인조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 조씨가 살아 있었는데 서인들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조씨의 상복을 3년복이 아닌 1년복으로 결정했다. 서인들은 이미 망한 명(明)의 임금이 황제이고 조선 임금은 제후에 불과하므로 왕가의 상복인 3년복이 아니라 사대부의 상복인 1년복을 주장한 것이었다. 서인 영수 송시열의 1년복설에 대해서 남인 이규가 “이를 어찌 왕가에 적용하겠는가?”라고 반박한 것처럼 남인들은 조선을 독립 왕가로 보아 3년복설을 주장했다.
남인 윤휴와 허목이 3년복설을 지지하고 나서 파란을 일으켰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서 조선정당사를 서술한 이건창은 ‘당의통략(黨議通略)’에서 “사람들이 윤휴의 설을 더 지지했으나 서인들이 송시열을 높이 받들고 숭상하므로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라고 쓰고 있고, ‘현종실록’의 사관도 “그때 군신(群臣)들은 다 허목의 말이 정론이라면서도 시의(時議)에 저촉될까 두려워 한 사람도 변론하는 자가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왕조 국가에서 군주가 승하했으면 3년복을 입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1년복설이란 궤변에 모두 입을 닫고 침묵했다. 그래서 자의대비 복제는 1년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윤휴, 허목 등 1년복설에 반대하는 남인들은 뜻을 굽히지 않았는데 이들을 ‘맑은 남인’이란 뜻의 ‘청남(淸南)’이라고 불렀다. 청남은 군주가 승하했는데 1년복을 입는 현종(재위 1659~1674)의 조정에는 나아가지 않겠다는 것인데, 윤휴·허목·이하진·오정창 등이 중심 인물이었다. 1년복이면 어떠냐면서 서인들과 어울린 남인들이 ‘흐린 남인’이란 뜻의 ‘탁남(濁南)’이었다.
예송논쟁 때 1641년생이었던 현종의 나이 만 열여덟 살이었고, 윤휴는 마흔둘, 허목은 예순네 살이었다. 결국 청남은 1년복설을 폐기하지 않는 한 평생 정계에 나아가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닌 선비들의 당이었다. 청남은 1년복설을 폐기하고 3년복설로 돌아간 숙종 때 정계에 나와서 진짜 북벌을 주창하고, 신분제 철폐 내지는 완화를 주창했던 개혁 정당이었다. 필자의 눈에는 현재 제도권 정당 중에서 청남만큼 원칙적이고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정당이 보이지 않는다.
요즘 여야를 막론하고 이런 저런 명목의 당 주류 옹호론과 이에 반대하는 분당론이 분출하고, 출마의 변도 속출하고 있다. 그러나 청남같은 원칙의 출사관은 보이지 않는다. 조선의 청남처럼 인생을 건 선비의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정치적 이익보다는 평생의 원칙을 중시하는 정치가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최소한 정치 모리배나 정치 깡패가 아니라 양 김씨(김영삼·김대중)처럼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에 인생을 건 정객(政客)정도는 되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정당을 보고 싶다. <순천향대학교 대학원 초빙교수>
그러나 윤휴, 허목 등 1년복설에 반대하는 남인들은 뜻을 굽히지 않았는데 이들을 ‘맑은 남인’이란 뜻의 ‘청남(淸南)’이라고 불렀다. 청남은 군주가 승하했는데 1년복을 입는 현종(재위 1659~1674)의 조정에는 나아가지 않겠다는 것인데, 윤휴·허목·이하진·오정창 등이 중심 인물이었다. 1년복이면 어떠냐면서 서인들과 어울린 남인들이 ‘흐린 남인’이란 뜻의 ‘탁남(濁南)’이었다.
예송논쟁 때 1641년생이었던 현종의 나이 만 열여덟 살이었고, 윤휴는 마흔둘, 허목은 예순네 살이었다. 결국 청남은 1년복설을 폐기하지 않는 한 평생 정계에 나아가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닌 선비들의 당이었다. 청남은 1년복설을 폐기하고 3년복설로 돌아간 숙종 때 정계에 나와서 진짜 북벌을 주창하고, 신분제 철폐 내지는 완화를 주창했던 개혁 정당이었다. 필자의 눈에는 현재 제도권 정당 중에서 청남만큼 원칙적이고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정당이 보이지 않는다.
요즘 여야를 막론하고 이런 저런 명목의 당 주류 옹호론과 이에 반대하는 분당론이 분출하고, 출마의 변도 속출하고 있다. 그러나 청남같은 원칙의 출사관은 보이지 않는다. 조선의 청남처럼 인생을 건 선비의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정치적 이익보다는 평생의 원칙을 중시하는 정치가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최소한 정치 모리배나 정치 깡패가 아니라 양 김씨(김영삼·김대중)처럼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에 인생을 건 정객(政客)정도는 되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정당을 보고 싶다. <순천향대학교 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