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의 ‘우리지역 우리식물’] 진도에서 만난 자란이라는 행운
2023년 08월 03일(목) 00:00
어릴 적 우리 집 베란다에는 식물 화분이 많았다. 베고니아, 소철류, 필로덴드론…. 우리 집의 식물은 다른 가정에서도 흔히 재배하던 평범한 종들이었다. 그 화분 중 가장 많은 개수를 차지하는 것은 난과 식물이었다. 주말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방문을 나서면 아빠는 늘 베란다에서 난의 잎을 닦아주고 있었다.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은 베란다에 핀 난 꽃을 보며 늘 같은 말을 했다. “난꽃이 피면 집에 복이 온다는데 집에 좋은 일이 생기겠네”라고.

그 말을 들은 부모님은 그저 웃어 넘기셨지만, 나는 내심 좋은 일이 생기길 기대했던 것 같다.

커서야 알게 되었다. 인간은 희귀하고 드물게 존재하는 자연물을 신성시해왔다는 것을 말이다. 난은 꽃을 잘 피우지 않는다고 알려져 왔기에, 이 꽃이 행운과 복을 가져다준다 믿었던 것이다.

난과 식물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오래전부터 식물 애호가들로부터 사랑받아 왔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자연을 경외하는 이들이 많아질 수록 난과식물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더해 갔다.

이유는 분명하다. 난과 식물은 다른 식물에게서 찾을 수 없는 단순하면서도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데다, 꽃을 자주 피우지 않고 희귀한 종이 많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의 인간이든 특별하고 이색적인 것에 쉽게 현혹당하는 듯하다.

10여 년 전부터 우리나라의 식물 문화가 중장년층에서 전 연령대로 확대되고 집에서 식물을 재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난과 식물을 재배하는 연령대는 여전히 한정적으로 보인다. 그 연유가 궁금해 원예가로 일하는 후배들에 물었더니 난과 식물은 가격이 비싼데다 꽃이 잘 피지않아 관상할 수 있는 부위가 적고, 재배가 어려워 손을 대기 어렵다고 한다.

물론 대다수의 난과 식물이 가느다란 잎만으로 대부분의 삶을 나는 것은 맞지만 모든 난이 그런 것은 아니다. 남쪽의 정원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자란만 해도 모두가 좋아하는 다육 식물의 꽃만큼 화려하고 큰 꽃을 오랜 기간 피워 낸다.

한자 ‘자줏빛 자’와 ‘난초 란’의 합성어인 자란은 우리가 난과 식물에 갖고있는 편견을 허물어 준다. 이들은 잎과 꽃줄기의 길이도 길며, 꽃이 자주 오래 피고, 줄기에 달리는 꽃의 개수도 많다. 무엇보다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아 재배가 수월하다.

형형색색의 잎과 꽃 그리고 긴 꽃줄기의 자란을 보면 외국 여느 열대 지역 원산의 식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나라에서도 분포하는 자생 식물이다. 전라남도 진도, 무안, 신안, 해남, 완도, 고흥, 그리고 제주도에 분포한다고 알려진다.

유럽에서는 이들이 ‘중국땅난’라는 이름으로 조경 식물로서 널리 심어지고, 다양한 품종으로 육성되어 왔다.

십여 년 전 진도에서 식물 조사를 하고 숙소로 가던 중 왠지 아쉬운 마음에 충동적으로 바닷가 앞 숲으로 발길을 돌렸다. 바위 몇 개를 건너 숲길을 헤쳐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저 멀리 자주색 꽃 몇 송이가 피어 있는 게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자란이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모습이었다.

숲의 개체는 정원에서 보던 모습보다 꽃대가 길었고, 꽃색은 좀 더 옅었다. 자란 관련 논문을 찾아보니 줄기에 달린 꽃은 많으면 12개까지 핀다고 하는데, 숲에서도 일곱 송이 이상 달린 것은 볼 수 없었다.

그날 내가 피곤하다는 이유로 큰 길을 따라 숙소로 바로 갔다면, 반대편 바닷가로 향했다면 자란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날의 경험 후 나는 넓고 편하고 빨리 가는 길이 아닌 좁고 불편하고 느린 길을 자주 선택했다. 그 선택의 결과에 나는 늘 후회가 없었다. 자란을 보고 돌아오며 열매가 열릴 때 다시 이곳을 찾으리라 결심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다시 그곳을 찾지 못했다.

누군가는 자란을 가리켜 너무 크고 잘 자라며, 희귀하지 않아 매력이 없다고도 한다. 그러나 나에게 자란은 꽃을 잘 피우고, 큰 꽃과 잎이 있고, 희귀하지 않아서 찾을 수 있었던 나만의 행운의 식물이다.

<식물 세밀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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