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의 ‘소설처럼’] 오늘은 정하게 살게 해줘요 -고명재 산문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2023년 07월 13일(목) 00:00 가가
누구나 자신의 채널과 목소리를 갖는 시대, 누구나 말할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으며 영상을 남기는 시대, 그것을 노출하기 위해 더 빠르고 자극적인 무언가가 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시인의 산문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어떤 자세로 무슨 색깔을 보여야 하는가? 아무래도 답은 없겠지만, 정답에 가장 가까운 근사한 답변을 읽고 싶다면 고명재 시인의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읽어도 좋겠다.
세상 보드랍고 또한 절실한 감각의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을 출간한 바 있는 시인은 이번 책에서 그 감각을 부려 놓을 그릇을 정교하고 미려하게 마련했다. ‘무채색’을 주제이자 대상으로 삼아 백 가지 이야기를 가나다순으로 부려 놓은 것이다. 그 이야기는 유년의 기억에서부터 하나의 단어나 이미지에 대한 집중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모두 ‘시(詩)’를 향해 있다. 누구나 자신의 채널과 목소리를 갖는 시대에 시인은 가장 오래된 채널(책)을 통해, 또한 가장 정한 목소리(시)를 말하는 것이다. 인스타그램도 아니지만, 유튜브도 아니지만, 이 목소리는 읽는 사람의 눈과 귀를 붙잡아둔다. 앞서 말한 것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인만의 마음과 그 마음을 담은 손짓으로. 그 색깔은 아마도 무채색일 것이다.
무채색은 흰 것도 검은 것도 아니다. 파란색이나 빨강색 같은 이름도 갖지 못했다. 흰데 희지 아니하고 검은데 검지 아니하다. 내게는 목포의 먹갈치가 사는 내내 그러한 것이었는데, 시인도 갈치에 대해 짧게 쓴다. “살이 너무 부드럽게 허물어져 장례를 치르고 한동안은 먹지 못했다. 이걸 참 좋아하던 사람이 떠났다. 기다란 빛, 은백색의 아슬아슬한.” 갈치를 칼치라 부르는 경상도에서 갈치는 검정보다 흰색에 가까웠나 보다. 아슬아슬하게도 완벽한 흰색은 되지 못하였지만. 시인은 우리에게 상실이나 슬픔이 완벽히 흰색이나 검정이 될 수 없음을 아는 듯하다. 김밥이 그렇다. 하얀 밥에 검정 김을 싸니 흑백의 세계인 것 같은데, 김밥에 돌돌 쌓여 버린 사연은 각각의 색이 다 있다. 그것이 시인의 글맛에 따라 입안에서 소용돌이친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합쳐져 무채색이 된다.
어떤 글귀는 아름다운 시를 준비하는 메모처럼 보이기도 한다. 눈사람을 두고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하여, 언제든 사라져버릴 사람을 우리는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이제 우리는 언제든 사라져 버릴 눈사람을 구태여 발로 차 버리는 사람들과 같이 사는 족속이 되어 버렸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눈사람은 언제나 시적이다. 시인의 문장을 읽으면 내게도 존재했던 언제든지 사라져 버릴 그 사람을 떠올리는 일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 생각을 해야만 누군가의 눈사람을 발로 차지 않을 수 있다. 눈사람에 나뭇가지라도 하나 쥐여줄 수 있다. 그 생각이 모이고 쌓여 한 편의 시가 될 것 또한 자명하다. 예컨대 이런 시다.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미래가 빛나서/ 눈 밟는 소리에 개들은 심장이 커지고/ 그건 낯선 이가 오고 있는 간격이니까/ 대문은 집의 입술, 벨을 누를 때/ 세계는 온다 날갯짓을 대신하여”(‘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일부)
가난한 기억은 지워 버리고 싶기 마련이지만, 어떤 가난은 몸과 마음에 올곧이 남아 그의 버팀목이 되고는 한다. ‘가루약’에서 시작한 책은 ‘흰 티’로 끝날 때까지 가난한 시절, 아픈 가족, 사랑하는 사람이 반복해 등장한다. 누구나 채널이 있고, 누구든지 목소리를 내지만 잘 하지 않는 말이고, 잘 들을 수 없는 이야기다. 시인은 ‘정(淨)하다’라는 말을 자주 쓴다. 백석의 시에서 처음 본 단어라서 그럴까?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라지만, 그것으로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정한’ 느낌이 난다. ‘오늘은 정하게 살게 해줘요.’ 속으로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들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 목소리를 백 번이나 듣고 나면, 희고 아름다운 터널을 걸어나온 듯하다. 꿈을 꾼 것일까? 그건 아니라는 듯, 무채색 아름다운 책 한 권이 내 앞에 놓여 있다. 제목은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이다. <시인>
가난한 기억은 지워 버리고 싶기 마련이지만, 어떤 가난은 몸과 마음에 올곧이 남아 그의 버팀목이 되고는 한다. ‘가루약’에서 시작한 책은 ‘흰 티’로 끝날 때까지 가난한 시절, 아픈 가족, 사랑하는 사람이 반복해 등장한다. 누구나 채널이 있고, 누구든지 목소리를 내지만 잘 하지 않는 말이고, 잘 들을 수 없는 이야기다. 시인은 ‘정(淨)하다’라는 말을 자주 쓴다. 백석의 시에서 처음 본 단어라서 그럴까?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라지만, 그것으로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정한’ 느낌이 난다. ‘오늘은 정하게 살게 해줘요.’ 속으로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들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 목소리를 백 번이나 듣고 나면, 희고 아름다운 터널을 걸어나온 듯하다. 꿈을 꾼 것일까? 그건 아니라는 듯, 무채색 아름다운 책 한 권이 내 앞에 놓여 있다. 제목은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