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예향 초대석] ‘문학의 울림’ 전하는 문학평론가 신형철
2023년 01월 30일(월) 19:25
“시는 읽는 게 아니라 겪는 것”
‘시 읽는 일’은 이론보다 경험이 중요…비평은 아름다움의 해석
지난해 펴낸 ‘인생의 역사’에서 ‘시는 인생의 육성’이라고 은유
학자·문학평론가·에세이스트 정체성 속에서 읽고 쓰고 가르쳐

문학평론가 신형철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는 2005년 계간 ‘문학동네’ 봄호에 평론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학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첫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를 비롯해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등이 현재도 꾸준히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다. 최근 펴낸 ‘인생의 역사’는 고통과 사랑, 죽음 등 인생을 관통하는 주제로 살펴본 첫 번째 시화(詩話)이다.

“나는 인생의 육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게 곧 시라고 믿고 있다. 걸어가면서 쌓아가는 건 인생이기도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인생도 행과 연으로 이루어지니까.”

신형철(47) 문학평론가(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는 지난해 가을 펴낸 ‘인생의 역사’(난다 刊)에서 ‘시는 인생의 육성’이라고 은유한다. 고조선대 가요 ‘공무도하가’부터 이영광 시인의 ‘사랑의 발명’까지 스물다섯 편의 ‘내가 겪은 시’를 엮은 ‘신형철 시화(詩話)’는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 학자와 문학평론가, 에세이스트로 바쁘게 활동하는 신 교수를 최근 광주시 남구 카페에서 만나 문학세계와 글쓰기에 대해 들었다.

◇“시인들로부터 질문하는 법을 배워”

“프롤로그에 실려 있는 브레히트의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는 25년 전에 읽었던 시입니다. 그때는 그냥 연애시로만 보였는데 이번에 아이를 낳으면서 이 시를 부모·자식 관계로 보니까 또 달라요. 이런 식으로 삶의 경험이 달라지면 똑같은 시인데도 다르게 보입니다. 그래서 ‘시를 다시 해석한다, 다시 읽는다’ 이런 표현보다는 ‘시를 다시 겪었다’ 이렇게 하면 좀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인생의 역사’ 책머리에 ‘내가 겪은 시를 엮으며’라는 제목을 붙였다. 시를 읽거나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겪는다’는 표현이 눈에 띈다. 그는 지난해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1월에 아들 ‘기룬’이 태어났고, 가을학기부터 9년여 활동했던 광주를 떠나 서울대에서 강의를 시작했으며, 이어 10월에는 신작 ‘인생의 역사’를 선보였다. 책머리에서 그는 ‘두 번째 평론집을 낸 이후에나 손질해보려고 5년 넘게 밀쳐둔 원고를 올해 서둘러 정리하게 만든 한 사람’을 언급하며 “그의 이름은 만해 한용운의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그리운) 것은 다 님이다’에서 차용되었다”고 밝힌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신 교수의 인생과 문학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독일 시인이자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를 다룬 프롤로그에서 “나는 누군가의 자식으로 45년을 살았고, 누군가의 아버지로 아홉 달을 살았을 뿐이지만, 그 아홉 달 만에 둘의 차이를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의 역사’라는 묵직한 제목을 붙인 ‘신형철의 시화(詩話)’는 시처럼 행과 연으로 이뤄진 ‘인생’을 그의 눈으로 풀어낸다.

-책머리에 “동서고금에서 산발적으로 쓰인, 인생 그 자체의 역사가 여기에 있다”고 쓰셨습니다. 책 구성이 ‘고통의 각’→‘사랑의 면’→ ‘죽음의 점’→‘역사의 선’→‘인생의 원’ 순인데, 왜 고통을 맨 앞에 배치했나요?

▲고통은 피하고 싶은 거지만 언제나 뭔가 시작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시련을 겪어봐야 ‘연애란 무엇인가?’ 생각도 하게 되고, ‘당신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문제가 많아!’ 이런 소리를 들으면 페미니즘이 뭔지 공부도 하게 되고 이런 것처럼 어쩔 수 없이 고통은 뭔가를 시작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측면에서는 고통이 있을 때 사랑도 소중하게 느껴지는 그런 힘도 있잖아요. 그냥 논리적으로 생각해봐도 고통이 맨 앞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밥 딜런의 ‘시대는 변하고 있다’와 W.H.오든의 ‘장례식 블루스’에서 촛불집회, 이태원 참사와 겹쳐 읽힙니다.(‘인생의 역사’는 지난해 10월말, 이태원 압사참사가 일어나기 직전에 출판됐다.)

▲장례식 블루스’는 이 책의 한 부분에 불과한데 이태원 참사가 터져 버리니까 많은 분들이 SNS에 인용을 했어요. 그걸 보고 저는 한편으로는 약간 서글펐죠. 왜냐하면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4년 전 책인데, 아직도 슬픔이 그 책으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이런 일이 앞으로도 계속 반복되려나, 이런 답답함이 있죠. 비슷한 사건들이 일어나면 사람들 감정이 또 반복되잖아요. 시는 감정을 잘 다루는 장르니까 다시 그 시를 보게 되는 겁니다.

-‘인생의 역사’에서 “누구도 시인들만큼 잘 묻기는 어렵다. 나는 그들로부터 질문하는 법을, 그 자세와 열도와 끈기를 배운다. 그것이 시를 읽는 한 가지 이유다. 인생을 질문하는 만큼만 살아지기 때문이다”고 하셨습니다.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를 “언어에 대한 환멸이 심해질 때마다 약을 구하듯 되돌아가는 책”이라고 하셨는데 시를 ‘읽는 것’(겪는 것)은 왜 중요한가요?

▲시는 제 전공이기도 하고 소중한 장르죠. 가장 깊게 뭔가 질문을 주는 그런 장르라고 할까…. 그래서 ‘내가 지금 뭘 물으면서 살아야 되는가?’, ‘어떤 질문을 던지면서 살아야 되는가’ 이런 것들을 고민하게 될 때 시로 괜히 돌아가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예컨대 릴케 시는 워낙 어렵고 깊어서 어느 시점에 이 시를 한번 읽었다고 해서 이게 다 읽은 게 아닌 거더라고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다시 겪게 되는’ 시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세상에 활자가 너무 많아서 지긋지긋할 때 갑자기 환멸스러울 때가 있잖아요. 아무 것도 읽기 싫고, 아무 것도 쓰기 싫을 때 릴케를 딱 펴보면 잘 세공된 문장들이 무슨 신전처럼 있는 것을 보면 갑자기 문장의 힘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긍정하게 돼요. 이렇게 자꾸 돌아가서 새삼스럽게 감동하고, 다시 시작할 힘을 얻게 해주는 게 시인 것 같아요

지난 2019년 6월 ACC 문화정보원에서 열린 ‘우리가 그리는 광주의 기억圖’에서 대담하는 신형철 교수(오룬쪽). ACC와 북클럽 문학동네가 선정한 책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의 저자인 문학평론가 김형중 조선대 교수, 문선희 사진작가와 ‘광주’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ACC재단 제공>
◇“제자의 문학평론 등단 무척 기뻐”

신형철 교수는 지난 2014년 봄부터 8년 6개월 동안 조선대 문예창작학과에서 재직했으며, 2022년 가을 학기부터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비교문학 협동과정)에서 대학원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특히 인터뷰 장소로 오는 도중 제자의 ‘신춘문예 등단’ 전화를 받았다며 무척이나 기뻐했다.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이근희(33) 씨가 서울신문 신춘문예(평론)에서 등단한 것.(그는 당선 소감을 통해 “비평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음을, 그 아름다움은 해석의 정확함에서 나옴을, 삶이 이와 다른 게 아님을, 가르치고 보여주신 신형철 선생님…”이라고 고마움을 표했다.)

이번 인터뷰를 위해 첫 책인 ‘몰락의 에티카’를 구매해 쇄(刷)를 확인해보니 놀랍게도 26쇄였다. 지난 2008년 출판된 평론집이 현재까지 독자들에게 꾸준하게 읽힐 정도로 ‘팬덤’을 형성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는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2020년)에서 ‘신 평론가의 글에서 보이는 명민함, 날카로움, 태도에 대한 호감’을 들며 “신 평론가가 쓴 글의 텍스트들은 그렇게 ‘자신도 알지 못한 시적, 작가적 인식의 새로움’을 ‘발견 당했고’ 그 발견의 해석은 독자들을 매료시켰다”고 분석한다.

신 교수는 ‘몰락의 에티카’에서 “나에게 비평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아름답게 말하는 일이다”고 했다. 출발점이나 현재나, ‘정확한 문장’을 쓰려는 글쓰기의 자세는 변함이 없다. ‘작품을 반복해서 읽은 만큼, 참고도서를 공부한 만큼, 생각을 오래한 만큼’ 글에 ‘나의 인장’(印章)을 분명하게 찍을 수 있다고 믿는다. 직업이 글 쓰는 사람이니까 글을 대충 쓰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두 번째 산문집인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2018년)에서 글짓기를 집짓기에 비유하며 지면(紙面)에 글을 짓기 위한 공정 혹은 준칙으로 ▲인식을 생산해 낼 것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 ▲공학적으로 배치할 것을 제시한다.

◇“머릿속 글 구상할 때 가장 행복해”

그는 학자와 문학평론가, 에세이스트라는 3개의 정체성 속에서 끊임없이 읽고, 쓰고, 가르친다. 신 교수는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공부’(2018년)에서 “이런 일들(세월호 참사와 개인적 아픔)을 겪고 나는 무참해져서 이제부터 내 알량한 문학공부는 슬픔에 대한 공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타인의 슬픔’으로 한발 나아간다. 한국 사회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그의 글 속에 ‘공동체’가 배어있어 더욱 울림을 남긴다. 신 교수는 2014년부터 9년 가까운 시간동안 광주에서 생활했다. ‘광주’라는 공간은 그의 글쓰기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인생의 역사’에 실린 ‘인간임을 위한 행진곡’을 읽어보면 광주에서 받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늠할 수 있다.

“저는 90년대 학번이니까 기본적으로 ‘광주’라고 하는 곳에 대한 부채감 같은 게 없지 않죠. 처음 여기에 직장을 얻게 됐을 때 정말 기쁘게 왔었고, 여기서 제가 뭔가를 한다는 것에 대한 다행스러운 그런 게 있었죠. 그래서 뭔가 광주에서 제안이 오면 ‘웬만하면 다 하자’ 이런 마음이었어요. 광주에 대한 글도 몇 편 쓰기도 했는데 대단한 것은 아니고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한테 광주는 역사적 부채감뿐만 아니라 첫 직장을 줬고, 제가 가족을 이룰 수 있게 해준 고마운 곳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마음의 빚도 있어요.”

신 교수는 그동안 첫 평론집인 ‘몰락의 에티카’(2008년)를 비롯해 산문집 ‘느낌의 산문집’(2011년)과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2018년), 영화비평집 ‘정확한 사랑의 실험’(2014년)에 이어 이번 ‘인생의 역사’까지 모두 5권의 저서를 선보였다. 시와 소설, 영화, 음악, 시사칼럼 등 스펙트럼이 폭 넓다. 이번 ‘인생의 역사’에 부록으로 실린 ‘오타쿠의 덕-어느 ‘윤상 덕후’의 고백’은 그의 또 다른 ‘음악’ 세계를 엿보게 한다. 앞으로 두번째 평론집과 번역서, 학술 연구서를 펴낼 계획이다. 글을 구상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구상중일 때는 너무 즐겁고 ‘아! 이거 분명히 좋은 글이 될 수밖에 없다’, 설레죠. 설계단계에서 메모할 때 너무 기분 좋죠. 그런데 쓰려고 앉으면 아무 것도 하기 싫어지고, 내 머릿속에 있는 글이 그대로 구현이 안 될 것 같다는 불안감 같은 게 있으니까 자꾸 미루게 되죠. 그러니까 머릿속에 있는 글이 제일 좋죠. 제일 행복하죠. 그중에 어떤 게 겨우, 간신히 써지는 거죠.”

/글=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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