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술래- 김향남 수필가
2023년 01월 16일(월) 00:10
갈수록 나는 바보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아무리 책을 봐도 덮고 나면 까무룩 하고 심지어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말이 튀어나올 때도 있으니 앞날이 걱정이다. 밑줄도 긋고 메모도 해 놓았건만 왜 기억조차 희미한가.

내가 이렇게 심드렁하면 또 이렇게 위로하는 사람도 있다. “콩나물이, 제가 자라면서 마신 물을 기억하겠느냐고요… 물을 기억하지 못해서 콩나물이 자라지 못하더냐고요… 콩나물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콩이라는 씨앗의 토양 위에 이루어진 물의 퇴적물이 아니겠느냐고요….”

그러면 나도 조금 위안을 얻긴 한다. 그렇지! 어디로 새 버렸는지는 몰라도 내 몸을 통과한 것만은 분명하니 어느 틈에라도 그 흔적은 있을 거야. 나는 다시 기억을 더듬고 생각을 되짚으며 숨어버린 것들을 찾으러 간다.

하지만 갈수록 막히는 게 많아지고 조바심이 커질 때면 위로는커녕 두려움이 앞선다. 새로운 것은 관두고라도 있는 것 까먹지나 말았으면 좋겠다. 게다가 세상사 고민이 읽고 쓰는 데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살기는 갈수록 어렵고 이래저래 인간관계까지도 더 궁색해졌다. 삶은 남루하고 비루하고 씁쓸한 것투성이다.

그런 날엔 가까이 마련해 둔 은신처로 향한다. 식영정, 서하당, 소쇄원, 환벽당, 명옥헌, 독수정, 취가정, 송강정, 면앙정, 풍암정…. 이 범상치 않은 단어들이 그 이름들이거니와 모두 내 별장이나 진배없는 곳이다. 자그마치 열 채도 넘는다.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수시로 들락거리지만 아무 타박도 안 한다.

나는 이곳저곳 내키는 대로 오간다. 세상에 땅 한 뙈기 갖지 못한 내가 이렇게나 호사를 누리다니. 암만 생각해도 과분하다 싶지만, 어느 구석인가는 이쁜 데도 있었나 보다. 햇살 그윽한 마루에 앉아 바람소리, 새소리를 슬카장 듣노라면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갈 힘이 생긴다.

오늘은 서하당(棲霞堂)이다. 노을이 깃드는 집이라니 이름만으로도 운치가 있다. 나는 먼저 식영정에 오른다. 서하당엔 잠깐 눈인사를 해두고 식영정 높은 누정에 올라 솔바람부터 쐰다. 멀리 물빛은 은은하고 바람은 청아하다. 건너편 산마루엔 구름이 피어난다. 가히 아름다운 절경이다. 그렇지만 이곳에선 오래 호젓하기 어렵다. 늘 먼저 온 사람들이 있거나 잇따른 방문객들 때문에 나 홀로 독차지하는 것은 바랄 수도 없다.

서하당은 그윽하다. 외지고 고즈넉하고 여유롭다. 사람 발길 뜸해선지 미물들이 주인이다. 거미가 줄을 타고 나방이 춤을 춘다. 파리가 날아들고 개미가 기어간다. 이런저런 벌레들이 제집처럼 날고 긴다. 평화로운 오후에 느닷없는 발소리가 반가울 리 없을 터, 모두들 후다닥 몸을 숨기는 눈치다.

뜰에는 굵은 나무들이 수행자처럼 서 있다. 지난가을엔 저 나무 밑에서 한 아름 열매를 주웠다. 떨어진 은행알이 발밑에 수북하여 그것들을 줍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거저 얻으니 그저 좋았다고 할까. 누런 열매들은 오롯이 나를 위해 남겨진 듯, 소슬한 볕뉘 아래 구수하고 짙은 향내를 풍겼다.

마루에 앉아 햇볕을 쬔다. ‘프레드릭’(레오 리오니의 동화)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다. 따스하고 편안하다. 어린 날의 그 마루 같다. 마루 끝에 앉아 두 발을 대롱거리고 있노라면, 서걱거리며 일어나는 대숲 바람과 댓잎 위에 부서지는 맑은 햇살이 얼마나 부드럽고 따스했는지…. 마당은 텅 비어 있고, 이따금 닭들이 홰를 치고, 나는 숙제도 하고 동화책도 읽었다. 해는 서산으로 숨어들고, 동쪽 산허리엔 금빛이 찬란했다. 해님의 옷자락인 듯 황홀하게도 빛났다.

지금 여기, 해는 보이지 않으나 내 등은 아직 따스하고 마루의 온기도 식지 않았다. 나는 햇볕을 모으고 바람소리를 듣고 나무들을 바라보며 문득 술래가 되었다. 아마도, 해는 사라지고 없어진 것이 아니라 저 너머로 숨바꼭질을 하러 갔을 거다. 술래가 찾아올 것을 은근히 믿으면서….

자박자박 어둠이 스며들고, 새들은 더욱 청아한 소리를 낸다. 삐웅! 삐이웅! 삐삐웅! 서로 화답하는 소리, 투두두둑 딱따구리 한 마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 사르락 사르락 바람이 다녀가는 소리. 적막이 불러오는 모든 소리와 술래가 된 나의 숨비 소리. 서하당 마루에 소리들이 모여든다. 해는 꼭꼭 옷자락을 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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