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ㅇ’이 있는 풍경- 김향남 수필가
2023년 01월 02일(월) 01:00 가가
‘청산별곡’은 고려 때부터 전해오는 우리 고유의 시가(詩歌)다. 하지만 누구의 작품인지, 어떤 상황에서 지어진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삶의 터전을 잃은 유랑민의 처지인지, 민란에 떠밀린 농민의 처지인지, 혹은 실연의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의 어쩌지 못하는 마음인지 추측만 있을 뿐이다.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가 누구였든 그다지 유복한 처지는 아닐 거라는 사실이다. 파산 지경의 몹시도 곤비한 처지거나, 어디 깊숙한 산속이나 외딴 바닷가로라도 가서 그 삶을 견디어야 하거나. 그러나 망설이고 돌아보며 쉽사리 떠나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구체적인 사정은 알 수 없어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의 고통스러운 내면만은 숨이 막히도록 무겁게 와닿는다.
그뿐인가. 그는 저항도 분노도 토해 내지 못한 채 제 가슴만 치고 있는 사람이다. 시름겹고 눈물겨운 서러운 사람이다. 어디서 날아온 돌인지 맞아서 울고 운명에 운다. 괴롭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현실만이 그 앞에 놓여 있는, 미워할 사람도 사랑할 사람도 없이 고립무원의 상태에 있는 사람의 속울음이다. 삶의 고통은 난데없이 날아온 돌처럼 피할 수 없으며, 짐대에 올라 아슬아슬 줄타기하는 광대처럼 위태롭기도 하거니와 어찌 독한 술이라도 한 잔 아니 마실 수 있으랴.
인생은 본디 고해(苦海)라고 하지만 이토록 숨도 못 쉬게 괴로운 것이라면 인류의 역사는 진즉에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소외와 권태와 척박함만이 도사리고 있는 곳에 사방은 꽉 막혀 빠져나갈 구멍 하나 없다면 질식해 넘어지는 것밖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러나 인류는 넘어지지도 않았고 삶을 끝내지도 않았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목마르면 샘물을 찾듯이 희망을 찾고 반전을 꿈꾸었다. 짐짓 딴청을 부려서라도 살길을 궁리했으며, 억지웃음을 웃어서라도 숨통을 틔웠다.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청산별곡’의 고단한 탄식은 보다시피 그 사이사이의 휴지(休止)로 말미암아 전혀 다른 차원으로 전복된다. 우리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그 뜻이 무엇인지는 더더욱 모르겠는 얄궂은 후렴구 덕분에 구절구절 팽팽한 긴장감은 문득 허물어지고 만다. 연과 연 사이에 징검돌처럼 놓여서 고통을 잊게 하고 또한 유예한다. 삶을 위로하고 흥취를 자아낸다. 물처럼 유유하고 가뿐한, 공처럼 탄탄하고 발랄한 후렴구의 반복으로 인해서다 ‘얄리 얄리 얄라성…’ 흐르는 듯 구르는 듯 ‘ㄹ’과 ‘ㅇ’의 떠받침으로 이 답답한 패배자의 노래는 비로소 숨통이 트인다.
요 얼마간 세상에서 낙오된 듯 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삶이 내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힘없이 당하는 자의 입장이 되고 보니 저 ‘청산별곡’의 화자처럼 깊은 무력감에 빠졌다.
“안녕?”
“요즘 어찌 지내시능공?”
때마침 카톡이 울린다. 친구 K. 그의 문자에는 늘 ‘ㅇ’이 달려 있다. 낭랑한 콧소리가 새삼 반갑다. 문자에도 표정이 있고 느낌이 있고 온도가 있어서 건너편의 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이야기 끝에 그는 더 많은 ‘ㅇ’을 모셔 온다.
“…너무 걱정하지 마셩. 기다려ㅂㅘㅇ. 내일은 꼭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용~~^^”
그의 ‘ㅇ’ 덕분에 고통을 잊었음은 물론 기분까지 풀렸으니 그 마음 씀이 새삼 고맙다. ‘얄리얄리 알라셩’에서처럼 말끝에 ‘ㅇ’을 하나 더 받쳐 놓았을 뿐인데 마음에 한결 여유가 생긴다.
‘ㅇ’은 한글 자모의 여덟째 글자로 ‘이응’이라 읽는다. ‘알’이나 ‘얼’에서와 같이 초성일 때는 음가가 없으나, ‘종’이나 ‘강’처럼 종성으로 쓰일 때는 바닷가의 몽돌처럼 단단하고 둥근 소리를 낸다. 앞에 있다고 으스대거나 뻐기지 않고 뒤에 있다고 제 역할을 부정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는다. 존재만으로도 은근히 힘이 되는 사람이 있듯이 ‘ㅇ’의 자리가 그렇지 싶다. 또 하나의 애국가로 불리는 ‘아리랑’에서도 ‘ㅇ’은 유쾌하고 발랄하게 제 역할을 다한다(물론 ‘ㄹ’도 함께).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하고 가만히 흥얼거려 보시라. 저절로 어깨가 들썩여질 것이다.
‘ㅇ’이 있는 풍경, 그 여백의 자리에서 숨통을 틔우고 힘을 얻어 다시 세상으로 나아간다.
‘청산별곡’의 고단한 탄식은 보다시피 그 사이사이의 휴지(休止)로 말미암아 전혀 다른 차원으로 전복된다. 우리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그 뜻이 무엇인지는 더더욱 모르겠는 얄궂은 후렴구 덕분에 구절구절 팽팽한 긴장감은 문득 허물어지고 만다. 연과 연 사이에 징검돌처럼 놓여서 고통을 잊게 하고 또한 유예한다. 삶을 위로하고 흥취를 자아낸다. 물처럼 유유하고 가뿐한, 공처럼 탄탄하고 발랄한 후렴구의 반복으로 인해서다 ‘얄리 얄리 얄라성…’ 흐르는 듯 구르는 듯 ‘ㄹ’과 ‘ㅇ’의 떠받침으로 이 답답한 패배자의 노래는 비로소 숨통이 트인다.
요 얼마간 세상에서 낙오된 듯 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삶이 내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힘없이 당하는 자의 입장이 되고 보니 저 ‘청산별곡’의 화자처럼 깊은 무력감에 빠졌다.
“안녕?”
“요즘 어찌 지내시능공?”
때마침 카톡이 울린다. 친구 K. 그의 문자에는 늘 ‘ㅇ’이 달려 있다. 낭랑한 콧소리가 새삼 반갑다. 문자에도 표정이 있고 느낌이 있고 온도가 있어서 건너편의 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이야기 끝에 그는 더 많은 ‘ㅇ’을 모셔 온다.
“…너무 걱정하지 마셩. 기다려ㅂㅘㅇ. 내일은 꼭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용~~^^”
그의 ‘ㅇ’ 덕분에 고통을 잊었음은 물론 기분까지 풀렸으니 그 마음 씀이 새삼 고맙다. ‘얄리얄리 알라셩’에서처럼 말끝에 ‘ㅇ’을 하나 더 받쳐 놓았을 뿐인데 마음에 한결 여유가 생긴다.
‘ㅇ’은 한글 자모의 여덟째 글자로 ‘이응’이라 읽는다. ‘알’이나 ‘얼’에서와 같이 초성일 때는 음가가 없으나, ‘종’이나 ‘강’처럼 종성으로 쓰일 때는 바닷가의 몽돌처럼 단단하고 둥근 소리를 낸다. 앞에 있다고 으스대거나 뻐기지 않고 뒤에 있다고 제 역할을 부정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는다. 존재만으로도 은근히 힘이 되는 사람이 있듯이 ‘ㅇ’의 자리가 그렇지 싶다. 또 하나의 애국가로 불리는 ‘아리랑’에서도 ‘ㅇ’은 유쾌하고 발랄하게 제 역할을 다한다(물론 ‘ㄹ’도 함께).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하고 가만히 흥얼거려 보시라. 저절로 어깨가 들썩여질 것이다.
‘ㅇ’이 있는 풍경, 그 여백의 자리에서 숨통을 틔우고 힘을 얻어 다시 세상으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