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림의 차이나 4.0] 천안문과 중국의 민족민주운동
2022년 12월 27일(화) 00:15 가가
조선대 중국어문화학과 명예교수
천안문과 그 앞의 광장은 중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중의 하나이다. 천안문의 원래 이름은 승천문(承天門)으로 명나라 영락(永樂) 15년(1417)에 궁성을 건립하면서 짓기 시작해 영락 18년에 건립되었다. 이 문은 1457년 낙뢰로 소실되고 1465년에 재건되었지만,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할 때 같이 소실되었다. 현재의 문은 청나라 순치(順治) 8년(1651년)에 재건된 것으로, 이때 천안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천안문의 만주어는 ‘하늘의 평안한 문’이라는 뜻이며 한문으로는 ‘하늘의 명을 받들어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백성을 다스린다’(受命于天, 安邦治民)는 글귀에서 가져왔다. 천안문 앞에 ‘T‘자형의 광장이 조성되어 있었으나 일반 백성들은 출입이 금지된 궁정의 광장이었다. 명청시대 법률이나 명령을 공표할 때 최초로 이 문에서 발표했고, 출전하거나 개선하는 군대를 황제가 점검하는 장소이기도 했던 천안문은 권력의 공간이었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천안문과 그 광장은 민중의 공간이 되었다. 중국 최초의 반봉건 반제국주의 운동이라 평가되는 1919년의 ‘5·4운동’을 필두로 하여, 노동운동의 상징이 되는 1925년의 ‘5·30운동’, 청년 학생들의 항일운동에 기반한 1935년의 ‘1·29운동’ 등과 같은 중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민족민중운동은 모두 천안문 광장에서 출발하였다. 청년 학생들과 일반 민중들이 모두 ‘가자, 천안문으로’라는 구호와 함께 결집한 공간이다. 지난한 역사적 과정을 중국인들과 함께 겪은 천안문은 이런 면에서 중국인들에게는 랜드마크이면서 한편으로는 이를 넘어서는 정신과 마음의 마크(sprit & mind mark)이기도 하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선포도 천안문 위에서 광장에 모인 수십 만의 군중 앞에서 진행되었으며, 문화대혁명 시기 백만의 홍위병이 모인 곳도 이 광장이었다. 1978년에서 1979년에 걸친 짧은 기간의 ‘베이징의 봄’ 시절에 수많은 대자보와 자작시가 나붙은 곳도 천안문 광장이었다. 1985년 청명절에 이전 공산당 총서기였던 후야오방의 사망에 이은 추도식이 계기가 되어 발생한 민주화시위도 천안문에서 시작되었고, 1989년 ‘6·4운동’도 베이징의 청년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천안문광장에 모이면서 본격화되었다. 이런 점에서 천안문 광장은 중국 민주화운동의 공간이기도 하다.
최근에 발생한 ‘백지 시위’는 제로 코로나 정책에 대한 항의에서 시작되어 공산당과 시진핑 주석에 대한 비판까지 이르렀다고 보도되었다. 신장 우르무치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의 피해자들에 대한 애도에서 시작된 백지 시위는 베이징, 상하이, 난징 같은 주요 도시로 확산되었고, 무명의 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일상의 회복을 요구했다. 백지 시위가 전국 주요 도시로 확산되는 와중에 중국 당국은 제로 코로나에서 위드 코로나로 정책을 변경했다. 백지 시위는 엄격한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일상이 파괴되고, 삶이 붕괴된 경우가 너무 많은 것에 대한 항의에서 출발하여 공산당에 대한 비판까지 수위가 고조되어 갔기 때문에 중국 당국으로서도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원래 백지 시위는 2020년 홍콩에서 시작되었다. 홍콩의 반정부활동을 제한하는 ‘홍콩 국가보안법’이 2020년 7월 베이징의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통과된 이후,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홍콩에서 발생하면서 백지 시위가 시작되었다. 백지는 사실 아무 것도 쓰여져 있지 않기 때문에 더 위력이 있을 수 있다. 백지 위에 보태지는 상상력은 의외로 힘이 강하고 전파력이 빠르다. 백지시위는 구 소련 시절 모스크바에서 있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한 사람이 모스크바 광장에서 백지를 들고 서 있었다. 경찰이 이 사람을 체포하자, 그 사람이 “여기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아요!”라고 항의했다. 경찰이 “네가 무엇을 쓸려고 생각하고 있는지를 내가 모를 줄 알아?”라고 윽박질렀다.
백지 위에 무슨 글귀가 쓰여질 것인지는 모르면서 아는 것이 되어 버렸다. 6·4 천안문 운동은 최고 교육을 받은 엘리트층들을 중심으로 의도와 목표가 있는 것이었다면, 백지 시위는 일반 시민들이 정상적인 삶과 일상의 회복을 요구하는 것이다. SNS는 이런 장면을 순식간에 중국과 세계에 전파해 버렸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발신하는 시대의 힘이라고나 할까.
최근에 발생한 ‘백지 시위’는 제로 코로나 정책에 대한 항의에서 시작되어 공산당과 시진핑 주석에 대한 비판까지 이르렀다고 보도되었다. 신장 우르무치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의 피해자들에 대한 애도에서 시작된 백지 시위는 베이징, 상하이, 난징 같은 주요 도시로 확산되었고, 무명의 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일상의 회복을 요구했다. 백지 시위가 전국 주요 도시로 확산되는 와중에 중국 당국은 제로 코로나에서 위드 코로나로 정책을 변경했다. 백지 시위는 엄격한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일상이 파괴되고, 삶이 붕괴된 경우가 너무 많은 것에 대한 항의에서 출발하여 공산당에 대한 비판까지 수위가 고조되어 갔기 때문에 중국 당국으로서도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원래 백지 시위는 2020년 홍콩에서 시작되었다. 홍콩의 반정부활동을 제한하는 ‘홍콩 국가보안법’이 2020년 7월 베이징의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통과된 이후,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홍콩에서 발생하면서 백지 시위가 시작되었다. 백지는 사실 아무 것도 쓰여져 있지 않기 때문에 더 위력이 있을 수 있다. 백지 위에 보태지는 상상력은 의외로 힘이 강하고 전파력이 빠르다. 백지시위는 구 소련 시절 모스크바에서 있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한 사람이 모스크바 광장에서 백지를 들고 서 있었다. 경찰이 이 사람을 체포하자, 그 사람이 “여기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아요!”라고 항의했다. 경찰이 “네가 무엇을 쓸려고 생각하고 있는지를 내가 모를 줄 알아?”라고 윽박질렀다.
백지 위에 무슨 글귀가 쓰여질 것인지는 모르면서 아는 것이 되어 버렸다. 6·4 천안문 운동은 최고 교육을 받은 엘리트층들을 중심으로 의도와 목표가 있는 것이었다면, 백지 시위는 일반 시민들이 정상적인 삶과 일상의 회복을 요구하는 것이다. SNS는 이런 장면을 순식간에 중국과 세계에 전파해 버렸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발신하는 시대의 힘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