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역사의 창’] 재상의 무게, 필부의 염치
2022년 12월 08일(목) 00:30
초나라 항우(項羽)와 한나라 유방(劉邦)이 맞붙었던 초한(楚漢) 전쟁에서 유방의 승리를 예견한 인물은 드물었다. 초나라 대장군 항연의 손자라는 출신 성분으로 보나, 보유한 군대 수로 보나,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용력으로 보나 항우는 성(姓)도 없는 부친을 둔 유방을 압도했다. 그러나 승자는 유방이었다.

중원을 차지한 유방은 낙양(洛陽)의 남궁(南宮)에서 술을 마시다가 공신들에게 “내가 천하를 갖고, 항우가 천하를 잃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물었다. 고기(高起)와 왕릉(王陵) 등이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한 고조 유방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이야기”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무릇 장막 안에서 계책을 짜내서 천 리 밖의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내가 장자방(張子房)만 못하다. 나라를 진정시키고 백성들을 위로하며 군량을 공급하거나 군량의 수송로가 끊기지 않게 하는 것은 내가 소하(蕭何)만 못하다. 백만 군사를 연합해서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는 것은 내가 한신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人傑)인데, 내가 그들을 등용할 수 있었으므로 천하를 취하게 된 것이다. 항우는 범증(范增) 한 사람이 있었으나 그도 등용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그가 내게 포로가 된 까닭이다”(‘사기’ 고조본기)

장자방은 전략가고, 소하는 경제가고, 한신은 군사가다. 전공 능력으로는 모두 유방보다 뛰어났지만 유방은 자신보다 나은 인재들을 등용했고, 그 결과 항우를 꺾고 승리했다는 말이다. 한(漢)나라 개국공신들의 공훈을 논할 때 1위는 경제를 책임졌던 소하였다. 이런 점이 평민 출신의 유방을 중원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광해군 15년(1623) 서인들은 광해군을 내쫓는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켰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극복에는 큰 공을 세웠지만 자신을 지지했던 북인(北人)들만 중용하다가 서인들의 쿠데타를 맞았다. 그러나 쿠데타의 성패 여부는 불확실했다. 1등 공신 이서(李曙)가 “반정 초에 나라 사람들이 갑자기 광해군 폐출 소식을 듣고 주상(인조)의 성덕(聖德)을 알지 못해 상하가 놀라 소란스러웠고, 향배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위세로써 진압하기도 어려워 말하기 지극히 어려운 사정이 있었다”(김장생 ‘사계전서’(沙溪全書))라고 전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광해군의 갑작스런 폐출에 반발하는 사대부들도 많았다. 서인들은 당초 김상헌(金尙憲)의 주장대로 남인·북인을 모두 배제하려고 하다가 곧 역량 부족을 깨닫고 반대당파였던 남인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전격 등용했다. 전 영의정 이원익은 인목대비 폐모에 반대하다가 여주(驪州)에 유배 중이었는데, “이원익이 앞 조정의 원로로서 수상(首相: 영의정)에 제수되어 입조(入朝)하자 인심이 안정되기 시작했다”(이건창 ‘당의통략(黨議通略)’)라고 말할 정도로 한 재상의 무게가 나라의 인심을 바꾸었다.

박근혜 정권이 몰락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핵심은 폭넓은 인재 등용을 외면하고 비선에 기대어 국정을 운영한 데 있었다. 박근혜 정권의 실정에 분노한 수많은 필부들이 촛불을 든 덕분에 문재인 정권이 들어섰지만 그때도 단 한 명의 소하, 장자방, 한신, 이원익 등을 발탁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권력을 쥔 자들의 얼굴 외에 무엇이 달라졌느냐는 싸늘한 시선 속에 자신들이 초고속 승진시킨 검찰총장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지금은 어떤가? 무려 158명의 젊은 목숨을 앗아 간 용산 참사에 대해서 고위층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이 현재 우리가 목도하는 정권의 현실이다. 국왕과 재상들이 정사를 못하면 하늘이 천재지변을 내려 벌한다는 것이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이다. 과학적 상관관계를 따질 것이 없이 재변이 발생하는 그 자체가 고위층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국왕을 갈아치울 수 없으니 재상들이 먼저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 아무 죄도 없이 죽어간 158명의 젊은 원혼의 무게와 재상 자리의 무게 중 어느 것이 더 무거운가? 최소한 필부의 염치는 갖고 사는 재상들을 보고 싶은 것이 필자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순천향대학교 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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