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의 ‘밥 먹고 합시다’] 서민의 술, 소주의 역사
2022년 11월 17일(목) 00:45
우리가 즐겨 마시는 소주는 이른바 희석식 소주다. 공법을 나눌 때는 연속 증류식 술이라고 한다. 증류란 양조한 술을 ‘고아서’ 내려 순수한 알코올을 최대한 많이 모은 것을 말한다. 보통 70, 80도까지 올라가는 증류주도 있는데 보통은 40도 정도로 맞춘다. 위스키가 대표적이다. 우리의 서민주이자 대중주인 소주는 일제강점기에 소개된 방식이다. 연속 증류라는 공정으로 저렴한 주정을 만들어 싼 술을 공급할 수 있었다. 만약 이런 희석식 소주가 없었다면 우리 술 물화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난, 소주 없으면 못 살아” “소주 말고 다른 술은 너무 비싸잖아” 이런 말을 많이 한다. 답을 말하자면, 한국 빼고 다른 나라들은 99.9퍼센트 희석식 소주를 마시지 않는다. 우리에게 이 소주 방식을 전파한 일본은 오히려 거의 증류식 소주를 마신다. 과거 일본이 경제 성장을 하기 전에는 희석식 소주를 마시기는 했지만 점차 사라졌다. 아직도 나이든 일본인들은 희석식 소주의 옛 추억을 거론하곤 한다. 실제 시중에서 팔기도 한다. 몇몇 브랜드가 살아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찾기는 아주 어렵다. 한국만이 희석식 소주의 가장 열렬한 소비국이다.

우리나라는 어려운 시기에 희석식 소주와 역시 간편하고 싸게 제조한 막걸리로 술을 조달했다. 제사 등으로 보통 집에서 만드는 술이 많았는데 일제강점기에 이미 전멸하다시피 했다. 허가받지 않은 가양주 제조를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정부 수립 후 박정희 정권 때 단속을 세게 했다. 술 내리는 데 아까운 양곡을 쓴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실은 소주용 주정과 막걸리용 밀가루를 국가가 독점하고 배정하면서 권력을 행사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물론 세수 증대 목적도 있었다.

그 덕(?)에 우리는 똑같은 소주를 마신다. 소주 원료인 주정을 한 회사에서 독점하고, 소주 회사마다 조금씩 다른 레시피 비법을 가지고 살짝 다른 맛을 생산할 뿐이다. 오랫동안 해당 지역을 벗어나서 소주를 팔지 못하게 함으로써 지역 소주 회사의 아성을 공고하게 해 주었다. 이런 문화는 은근히 소주에 대한 지역민의 충성심을 강화해 주었다. 소주의 지역 독점 공급 방식이 해제된 지금도 이런 현상은 남아 있다. 나름대로 지역의 소주는 개성이 있었고, 향토애와 맞물리면서 성장하고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다. 예를 들어 호남 지역의 보해 소주는 단순히 지역에서 나는 소주가 아니라, 박해받았던 오랜 정치적 상황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목포의 삼학 소주는 김대중 선생에게 정치 자금을 제공했다 하여 정부에 밉보이고 파산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값싼 소주가 없었다면 우리 대중 음식 문화는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기는 하다. 비판적으로 볼 수도 있고, 그것이 하나의 우리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소주를 바라보기도 한다. 나는 둘 다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원인이야 어떻든 희석식 대량 생산 공장 소주가 있어서 소박하고 저렴하게 한잔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전부’ 똑같은 소주를 마시는 것도 한국 술 문화가 정체되어 있는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다.

90년대에 홍주를 보러 진도에 갔다. 허화자 할머니 댁이었는데, 놀랍게도 옛날 그대로 나무를 때어 술을 한 방울씩 내리고 있었다. 오래된 술 고리, 침침한 불빛의 부엌, 자욱한 연기가 가내에서 만드는 전통주의 역사를 보여 주었달까. 무엇보다 내린 술의 맛이었다. 세상에! 이런 술맛이 있다니. 나는 거의 탄식을 했다. 한 방울만 마셔도 입안에 몇 시간이고 남는 깊은 향, 목젖을 울리고 떨어지는 술맛이 완벽했다. 수입 증류주인 위스키나 마셔봤던 내 혀와 코에 충격이었다.

안동의 소주와 함께 진도 홍주의 이런 고집스러운 노력이 있어서 이후에 한국의 증류주 문화가 다시 부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요새 좋은 가양주, 국산 증류주가 많이 나온다. 주머니 사정을 따지면 은근히 부담스럽지만 와인이며 위스키 값을 생각하면 과연 어려운 값만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부어라 마셔라 하지 않고 한두 잔씩 음미하기에 전통주의 향은 충분하다. 진도 홍주 고아 내리던 그 부엌이 다시 생각나는 시절이다.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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