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저녁노을 같은 배웅 - 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수필가
2022년 10월 23일(일) 23:30
조금 쌀랑쌀랑하다. 늦가을 단풍을 담은 몇 잔이었는데 제법 취했다. 자고 가란 청을 뿌리치고 나선다. 어차피 내 집이 편해서다. 몇 마디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읍내 정류장이다.

버스를 타고서야 손 흔드는 딸 모습이 보인다. 아차! 마을까지 혼자 걸어갈 녀석 모습이 아른거린다. 쉽게 닿을 거리는 아니다. 못난 아비가 무사히 버스를 탈 수 있도록 말동무를 해준 게다. 혼자 갈 길이 춥고 좀 멀어 보인다. 진즉 보냈어야 했는데 딸 이야기에 나우 취했나 보다.

엊그제 본 영화가 떠오른다. 데이비드의 삶을 다룬 다큐 ‘장의사’는 아일랜드 마을 사람들과 가족이 사자를 떠나보내기 전에 밤새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경야(經夜)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망자와 마지막 시간, 혼자 갈 수 없기에 누군가가 배웅해 주는 숙연한 순간이었다.

그 묵직한 순간을 떠올리며 두 손을 주머니에 깊숙이 넣는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서 그간 수많은 만남을 떠올려 본다. 좋았던 불편했던 이젠 한 갑자를 돌았으니 조금씩 내 삶에서 그 만남들을 배웅해야 한다. 이왕지사 서운하지 않게 따뜻하게, 그리고 다시 만날 수 없을 테니 멀리 배웅할 참이다.

시골집에 가면 늘 돌아오는 시간이 두려웠다.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는 멀리 나오지 못하셨다. 대문 앞에서 손을 흔드시는데 나는 애써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차를 탔다. 너릿재를 넘어 광주로 돌아오는 날, 무등산이 온통 붉게 노을로 뒤덮여있었다. 저녁노을이 나를 배웅해주는 것 같았다. 붉은 노을은 나를 멀리 배웅해 준 어머니의 시붉은 눈시울이었다.

노을이 하루를 선홍빛으로 배웅을 하듯, 가로등 불빛이 희미해지도록 멀리 비추듯, 기차가 기적 소리로 아련히 보내 주듯, 그래서 안개처럼 시나브로 배웅하고 싶다. 스르르 녹아 버린 아이스크림처럼, 포근해서 나도 모르게 잠이 드는 솜이불처럼, 그렇게 조용히 그리고 슬그머니 보내고 싶다. 그런 면에서 딸은 눈치조차 채지 못하도록 들꽃 향기처럼 날 배웅한 셈이다.

배웅은 이렇듯 멀리 떠나는 아들의 두 손을 꼭 잡고 건네준 어머니의 따뜻한 도시락 같으면 좋을 것 같다. 일터로 나가는 남편의 등에 덮어준 아내의 웃옷 같은 것이면 좋지, 싶다.

배웅하다 보면 간혹 실랑이도 벌였다. 돌아가라는 이와 더 배웅해 주겠다는 이의 말씨름, 딱 중간쯤이었다. 좀 더 가겠다는 이와 이제는 다 왔으니 돌아가시라는 이의 밀고 당김은 배웅의 꽃이었다. 그 줄다리기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마중이 앞을 따뜻하게 해 준다면 배웅은 이렇듯 등부터 따듯하게 한다.

딸은 지금쯤 마을 입구에 다다랐을 거다. 돌아가는 길은 혼자라서 멀고 먼 길이다. 상대가 짊어질 그 외로움 한 조각을 대신 짊어지는 일이 배웅이다. 혼자 가면서 겪을 외로움, 쓸쓸함을 오롯이 나누어 짊어지고, 바람도 달도 어둠도 그를 대신해서 반쯤은 옮겨오는 것이기에 오래도록 여운이 남기를 바란다.

어느 나라에서나 장례식은 각별하다. 윗세대들이 아랫세대에게 해 준 빚, 그동안 진 고마움에 대한 작은 답례 의식이다. 그래서 함께 고인을 추억하고 되새기는 시간은 이별의 시간이 아니라 만남의 시간이다. 잘 만나기보다 더 잘 헤어지는 이가 멋진 사람이다. 아름다운 관계를 맺는 이의 뒷모습에는 늘 멋진 노을 같은 배웅이 있다.

가족이나 친구와 헤어지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까지 따라가는 배웅, 일과를 마치고 헤어질 때도 기꺼이 몇 걸음 내어 주는, 우유를 놓고 가는 아줌마에도 감사하는 말 배웅을, 거리에서 소맷자락을 스치는 사람들과 선한 눈 배웅, 이 얼마나 멋진가.

승용차나 버스를 핑계로 우린 이별의 예법을 생략하지는 않은 지. 빨리빨리 하려다 상대에게 깊이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는지, 그러면서 고독하다고 우울해 하지는 않는가. 굳이 아까운 시간을 거기에 쏟을 필요가 있느냐며 생략해 버린 그 순간, 그 시간에 담긴 진짜 소중함을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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