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장재성과 장석천- 김동환 광주시 메시지기획 팀장
2022년 10월 19일(수) 22:00
최근 출간된 도서가 세간의 화제다. 안중근 의사 일대기를 다룬 김훈 소설가의 ‘하얼빈’은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 종합 1위에 올랐고, 평소 독립운동사에 관심이 많은 강기정 광주시장도 간부회의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직자들에게 추천할 정도다.

‘하얼빈’이 대형 출판가와 서점가를 중심으로 화제에 오른다면, SNS를 통해 입소문이 나고 있는 책도 있다. 성균관대 사학과 임경석 교수의 신간 ‘독립운동 열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하얼빈이 워낙 잘나가니 “나 하나쯤이야” 하는 심리라고 할까? 어느덧 ‘SNS 베스트셀러’ 독립운동 열전에 조금 더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실 임경석 교수는 한겨레21 ‘임경석의 역사극장’을 통해, 또 과거 저술한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과 같이 ‘잊힌’ 역사인 진보적 독립운동을 대중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상당한 필력의 역사학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다 보니 입소문을 타는 것도 당연지사.

김립 암살사건, 다나카 저격범 오성륜의 탈옥, 조직을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 책임 비서 김재봉, 혁명에 몸 바친 김사국·사민 형제 등 ‘잊힌 사람 전문가’의 서술답게 열전은 그 목차에서부터 전공자가 아니라면 낯설고 어색한 사람과 사건들로 가득하다. 그 속에 눈길을 끄는 두 사람이 있다.

장재성과 장석천.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다. 1919년 3·1운동 이후 최대의 항쟁이라 평가받는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두 주역. 그러나 현대사의 질곡과 함께 ‘역사의 철창’ 안에 갇혀버린 비운의 독립운동가.

러시아와 중국 혁명 과정에서 전 세계를 휩쓴 사회주의를 일본 제국주의 식민 통치 체제를 극복하는 저항 이데올로기로 활용하고자 했던 두 청년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국화를 기획한 유능한 독립운동 지도자였다.

역사의 변환점은 반드시 계기를 필요로 한다. 과거 3·1운동이 국내외 독립운동 진영의 대단결을 가져오고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통합을 가속화했음을 상기한다면, 광주학생독립운동 전국화의 온전한 성공은 체포와 고문으로 지칠 대로 지쳐버린 1920년대 후반의 독립운동 정세를 일거에 전환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장재성과 장석천의 이름이 갖는 무게감도 지금과는 꽤 다를 터.

아니면 한편으로 지나치게 일관된 자기 신념으로 살아서 문제가 되었을까?

장재성은 광복 후 1946년 민족주의민족전선 전남대표, 48년 남북연석회의 해주대회 등 줄곧 비합법 공간에 머물렀다. 그러다 결국 49년 남로당 가담 혐의로 사찰계 형사들에게 체포돼 7년 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했으나 6·25전쟁 중 다른 정치범 수감자와 함께 총살되었다고 한다.

장석천도 형무소를 무사히 빠져나오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 1932년 적색노조 사건으로 두 번째 투옥된 그는 경성지법에서 2년을 선고받았으나 고문으로 중병에 걸린 채 보석으로 출옥, 35년 10월 18일 자신의 청춘을 바친 광주학생운동 발상지 광주고보 인근 자택에서 쓸쓸하게 숨을 거둔다. 장재성과는 달리 광복 이전 사망으로 건국포장과 애국장이 추서된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뿐, 역사 속 복원은 아직 한참 멀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광복 77주년.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에서 G7의 위상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는,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흔들 수 없는 품격 있는 나라의 새 역사는 ‘포용’에서부터 시작한다. 광주학생운동의 두 지도자를 포함해 사상의 편린으로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걸출한 독립운동가들이 아직도 많다.

문재인 정부 시절, 학계와 시민사회 중진들로 구성된 보훈처의 자문기구 ‘국민 중심 보훈혁신위원회’의 권고대로 1945년 8월 15일을 기준으로 그때 누구보다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했다면, 광복 후 행보는 평가의 여지를 남겨 두고 이제 우리 역사 속 ‘주류’ 독립운동가로 당당하게 복원해 보자.

이제 그럴 때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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