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예향] 드라마·영화·출판 통해 문화콘텐츠로 부활하는 사투리
2022년 10월 17일(월) 18:00
‘삶의 언어’ 사투리가 살아난다
지역 고유의 생활문화 담긴 사투리
시·소설부터 영화·디자인까지 폭넓게 활용
문화의 보고로 가치 조명…매력 재발견
지역고유의 생활문화와 개성을 담은 사투리가 문화콘텐츠로 부활하고 있다. 시와 소설은 물론 드라마, 영화, 가요,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활용되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방언과 토착어, 지역말(지역어), 토박이말로 불리는 각 지역 사투리는 빠르게 소멸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우리말의 화석’이자 ‘문화콘텐츠의 보고(寶庫)’인 사투리의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전라·경상도 사투리 버전 ‘어린왕자’ 인기

“니 장미를 그마이 소중하게 만든 기는 니가 니 장미한테 들인 시간 때문 아이가.” “니: 장미를 그ㄹㅡㅎ게 특벨허게 맨들어 준 건 니:가 니:장미헌티 들인 시간이여.”

프랑스 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원작의 ‘어린 왕자’(Le Petit Prince)를 경상도와 전북 사투리로 옮긴 ‘애린 왕자’와 ‘에린 왕자’의 한 대목이다. 경북 포항 태생의 ‘도서출판 이팝’ 최현애 대표와 전북 전주 출신의 심재홍 작가가 각각 각색했다. 독일 출판사 ‘틴텐파스’(Tintenfass)가 진행하는 ‘어린 왕자’ 세계 언어버전 프로젝트의 에디션 125번째 작품으로 지난해 세상에 첫 선을 보였다. 질박한 경상도와 전라도 사투리로 쓰인 ‘어린 왕자’를 읽다 보면 특유의 어감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지역고유의 사투리가 문화콘텐츠로 부활하고 있다. 요즘 시와 소설은 물론 드라마, 영화, 가요,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사투리가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토박이들이 사용하는 사투리는 ‘우리말의 화석’이자 ‘문화콘텐츠의 보고(寶庫)’이다. 하지만 지역 사투리는 빠른 속도로 소멸돼 가고 있다. 사투리를 살리기 위해서는 보존정책과 함께 생활 속 사투리 사용 등 전승노력이 절실하다.

100년 전 제주 사투리를 담아낸 드라마 ‘파친코’.
영화와 드라마, 가요 부분에서도 사투리가 적극 활용된다. 지난 2003년 개봉된 영화 ‘황산벌’을 연출한 이준익 감독은 ‘거시기’라는 사투리를 이용해 신라와 백제간 전쟁을 코믹하게 그려낸다. 백제군끼리는 쉽사리 의미가 통하는 ‘거시기’ ‘머시기’가 삼국통일을 꿈꾸는 신라군에게는 마치 암호와도 같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재일조선인 4대 가족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 애플tv+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에서도 100여 년 전 제주도 사투리를 온전하게 살려냈다. 사투리로 노랫말을 쓴 대중가요도 잇따라 발표됐다. ‘감수광’(혜은이)과 ‘천방지축’(문희옥), ‘와 그라노’(강산애), ‘봉숙이’(장미여관), ‘삼춘’(양정원), ‘팔도강산’(BTS) 등이 대표적이다.

#“찰지고 맛나고 한시러운 전라도 말”

“전라도말맹키로 유식 허고 찰지고 맛나고 한시럽고 헌 말이 팔도에 워디 있습디여.”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속 인물인 염상구 청년단장이 임만수 토벌대장에게 펼치는 ‘전라도말 예찬론’(禮讚論)이다. 여수와 순천, 보성, 벌교 등 전남 동부권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의 생생한 토박이말은 소설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철학자 윤구병 선생은 “고향 말은 갓 태어나면서부터 귀가 어두운 늙은이가 될 때까지 귀에 절은 말”(‘내 생애 첫 우리말’)이라고 표현했다. 이기갑 목포대 명예교수는 지난 2015년 펴낸 ‘전라도 말 산책’(새문사 刊)에서 “사투리는 그 지역 토박이들의 일상적인 삶을 지배하는 언어”라며 전라도 사투리의 특징으로 ▲아름다운 꾸밈말 ▲정이 담긴 말 ▲생생한 말 ▲순수한 우리말을 꼽는다. ‘살망살망 비비다’ ‘몽글몽글 썰다’ ‘쫑쫑 썰다’처럼 동작이나 모습을 꾸미는 말에서 전라도 토착어의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또 ‘조물조물 무치다’ ‘다갈다갈 볶다’ ‘물컹허니 삶다’ ‘쌀칵쌀칵 씹히다’ 등 꾸밈말을 표준어로 옮기면 전라도말의 맛이 사라져버린다고 설명한다.

초등학교 교장 출신인 정현창 전남대 문화유산연구소 연구원(문화재학 박사)은 지난 2000년부터 20여 년 동안 광주와 전남·북 지역을 돌며 지역사투리를 수집한 3만5000여 개의 토박이말을 수록한 ‘사투리 사전-전라도말 모음’(전남대 출판문화원 刊)을 펴냈다. 35년간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쳐 온 위평량 박사(문학) 또한 사라져가는 지역 토속어의 근원을 정리한 ‘전라도말의 뿌리’(도서출판 북트리 刊)와 내 고향 사투리의 뿌리를 찾아가는 ‘팔도 말모이’(21세기사 刊)를 세상에 내놓았다.

같은 전라도라 해도 지역마다 사용하는 어휘가 다르다. 부추를 예로 들면 광양·여수·순천·고흥에서는 ‘소풀’, 구례에서는 ‘솔’과 ‘소불’이라 하고, 나머지 지역은 ‘솔’이라고 부른다. 1990년대에 경남 서부지역(하동·사천·진주)에서는 ‘소풀’이라고 했으나 지금은 교통수단의 발달로 부산에서 쓰는 ‘정구지’로 바뀌었다. ‘귄 있다’(귀염성이 있다), ‘포도시’(겨우), ‘항꾸네’(함께), ‘암시랑또 않다’(아무렇지도 않다)와 같이 전라도 지역에서 주로 사용하는 특정 단어들이 눈에 띈다. 표준어로 표현하거나 대체할 수 없는 뉘앙스의 어휘들이 전라도 토박이 말속에 보석 원석처럼 숨어있는 것이다. 위평량 박사는 역저 ‘전라도말의 뿌리’에서 “우리 지역의 말들은 ‘솔찮이’, ‘똘것’과 같이 대대로 사용해 오던 지역 고유의 것들이 많은가 하면, 지금은 사라진 고어(古語) 형태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우리말의 보물창고라는 점이다”고 강조한다.



전라도 사투리가 돋보이는 영화 ‘황산벌’.
#“토박이말 사용은 지역 살리기 첫 걸음”

시대상 변화에 따라 토박이 말들이 시나브로 사라지고 있다. 이처럼 사투리가 소멸되는 까닭은 우선 서울말을 중심에 둔 정부의 표준어 정책에 있다. 정승철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방언의 발견’(창비 刊)에서 “표준어는 식민지를 개척하려는 제국주의 국가나 그러한 제국주의로부터 독립을 모색하려는 피식민국가 구성원 모두가 그 필요성을 인정한 서구적 근대화의 산물”이라며 “북한의 말다듬기 운동과 문화어 운동, 그리고 남한의 국어순화운동과 표준어 보급운동이 경쟁적으로 추진되는 가운데 한국 전역의 사투리는 그리 큰 저항 없이 소멸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고 분석한다. 또한 산업화·도시화 추세에 따라 젊은 세대들이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서 주로 생활하는 라이프 스타일도 사투리 소멸에 영향을 미친다. 고향의 말을 감추고 표준어로 말하려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에 거슬러 많은 소설가와 시인들이 ‘글말로서의 사투리 문학어’를 창조했다. 우리말의 외연(外延)을 넓히는 작업이다. 경남 통영 말을 뼈대삼아 대하소설 ‘토지’를 남긴 박경리를 비롯해 이문구, 현기영, 조정래, 최명희, 송기숙, 최일남, 김주영, 황석영, 문순태 등 작가들을 꼽을 수 있다. 지난 8월, 시집 ‘그라시제라’로 ‘노작문학상’을 수상한 영암 출신 조정 시인은 “전라도 서남방언을 바탕으로 모어의 확장 가능성과 그 아름다움을 한껏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역어 소멸에 대응해 광주·전남 등 각 지역별로 토박이말을 보존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이 시도되고 있다. 사투리 수집과 ‘방언 사전’ 발간, 사투리보존회 창립, 사투리 말하기 대회, 사투리를 활용한 상품 개발, 사투리 보존 조례 제정 등 다채롭다. 지자체 시책과 슬로건에도 사투리가 도입됐다. 광주시 공영자전거 이름은 ‘타랑께’, 광주시 문화관광 브랜드명은 ‘오매광주’이다. 부산시는 ‘2030 부산 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를 위한 공식홍보 포스터에 ‘함 이기보까’(함 이겨볼까)라는 사투리 문구를 과감하게 사용해 눈길을 끌었다.

지역 사투리를 살리는 길은 일상에서 널리 사용하는 것이다. ‘사투리의 생활화’가 시급하다. 전남문화재단과 경북문화재단은 최근 전남과 경북 사투리를 활용한 5분 이내 영상작품을 공모해 ‘제1회 영·호남 사투리 경연대회’를 개최했다. 광주역사민속박물관과 전라도닷컴 또한 올해로 10회째인 ‘아름다운 전라도말 자랑대회’를 오는 22일 광주 비엔날레전시관 거시기 홀에서 연다.

사투리가 살아야 지역문화도 살아난다. 사투리 보존과 활용 문제는 지역문화 정체성과 경쟁력 문제와 직접 연결된다. 연구자들은 정부가 적극 나서 각 지역 사투리를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해야 된다고 말한다. 구축된 방언 빅데이터를 활용해 사투리를 알아듣는 AI(인공지능)가 나오는 시대를 맞고 있다. 언어는 시대변화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동시에 겪는다. 토박이말의 미래는 어떠할까? 철학자 윤구병 선생은 ‘내 생애 첫 우리말’에서 화두를 던진다.

“우리말의 미래는 다만 옛날 말을 되살리는 것에만 기댈 수는 없어. 어떻게 하면 옛말을 바탕에 두고 새로운 우리말을 만들 것이냐의 문제를 함께 머리 싸매고 풀어가야 할 거야.”

/글=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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