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에 앉아- 김향남 수필가
2022년 10월 17일(월) 00:00 가가
창가에 앉아 볕을 쬔다. 가을은 아직 청아한 바람과 따스한 햇볕을 온 세상에 뿌려주고 있다. ‘막바지 열매들을 영글게 하시고, …영근 포도송이가 더 온전하게 무르익게 하시고, 짙은 포도주 속에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시려는가.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시려는가.
‘릴케’도 ‘김현승’도 햇볕을 사랑했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시는 이 맑고 따스하고 넉넉한 것에 대한 경애와 사랑의 노래다. 변함없이 공평한 것에 대한 감사의 노래이며, 조용하고 평화롭고 눈부신, 단단하고 웅숭깊은 것에 대한 찬미의 노래다.
노래는 늙지도 변하지도 않은 채 수많은 시간을 건너와 지금 여기 우리 동네, 우리집 거실에도 참 따스하게 내려와 있다. 창가의 화초들에도, 강아지 ‘요키’에게도, 그리고 고단한 내 어깨 위에도 맑고 환하게, 순하고 따스하게 내려앉아 있다.
건너편 숲에선 시나브로 채색 작업이 한창이다. 저 양양하신 해님은 서산으로 넘어간 뒤에도 뜻밖의 후광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듯이, 저 숲의 나무들도 저마다 노랗고 붉은 색채의 향연을 기막히게 펼쳐낼 것이다. 그럴 때면 세상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하늘은 맑고 햇볕은 따스하고 바람은 성글게 불고 있다. 아파트 공터에 문득 익숙한 풍경이 보인다. 누구의 손길인지 고추며 토란대가 정갈하게 널려 있는 것이다. 햇볕을 받아 반짝반짝 윤기가 돈다. 잃어버린 고향을 만난 듯 정겹고 포근하다.
유년의 가을엔 늘 뭔가가 널려 있었다. 마당엔 타작한 곡식들과 붉은 고추, 나박나박 썬 하얀 호박이, 장독대 옆에는 볏짚에 엮인 무청 다발이 꼬들꼬들 말라가고 있었다. 빨랫줄엔 빨래들이 마르고 대숲에선 깊게 들어찬 햇살에 사락사락 어둠이 말라 갔다. 습하고 눅눅한 것들에는 햇볕만이 유일한 처방인 듯 요리조리 되작되작 바지런히 말려졌다. 그리하여 향은 더 짙어지고 맛은 더욱 풍부해져 밥상 위의 별미가 될 수 있었으니, 그 알뜰하고 살뜰한 모습은 가을 하면 생각나는 가장 따스한 정경이다.
지금 저 속에는 햇볕도 바람도 옹골차게 스며들고 있을 것이며, 포르릉 참새, 푸드덕 날아온 까치, 지저귀는 새들의 소란도 고스란히 섞여들 것이다. 제 몸의 물기를 싹 다 날리고 새로 맞은 것들을 고이고이 모셔둘 것이다. 이윽고 다시 몸을 푸는 날이면 수줍고도 천연스럽게 그 귀환을 알릴 것이다. 그날은 모으고 풀어내는 것의 숭고한 미덕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름 없는 기부 천사의 선행처럼 뭉클한 감동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런 날이면 밥상의 풍경도 잔치처럼 향긋하고 은성할 것이다.
햇볕에 나앉아 있으니 나도 물기 여읜 고추처럼 투명해지는 것도 같고 오장육부까지 고슬고슬해지는 것도 같다. 옹졸했던 마음이 스르르 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정도면 됐지 무얼 더 바랄까 싶어지기도 한다. 더 갖지 못해 안달하는 삶이었다는 것도 새삼 후회된다. 햇볕 속에 있노라니 말랑말랑 노근노근 욕심조차 없어지는 듯하다.
견유학파(犬儒學派)로 불리는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말 그대로 ‘개 같은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개처럼 무욕(無慾)하고 자족(自足)하며 무치(無恥)한 삶을 추구했거니와 어떤 욕심도 내지 않고, 부와 명예와 권력 따위에는 관심도 없으며, 현재의 처지에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았다. 배부르면 따뜻한 곳을 찾아 잠자는 것을 낙으로 삼고,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개와 같은 삶이었다. 가진 것이라곤 남루한 옷과 지팡이밖에 없으며 나무통을 집으로 삼아 살아가는 ‘거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정복왕 알렉산더의 호의를 주저 없이 물리쳤을 정도로 당당하고 자유로운 삶이었다.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겠다는 최고의 권력자 앞에서 “그렇다면 햇볕이나 가리지 말아주시오”라고 태연하게 응수했다고 하니, 그 배포가 부러울 따름이다. 그에게 이 세상의 부와 명예와 권력은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것들은 한순간의 따사로운 햇볕보다 못한 것이었다.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하마터면 모든 것을 잃어버릴 뻔한 위험한 순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햇볕에 앉아 네 다리 쭉 뻗은 견공(犬公)의 잠꼬대와 함께 모처럼 ‘비옥한’ 시간을 즐기는 중이다. 디오게네스에 비할 바는 전혀 아니지만, 이 따스하고 하염없는 것의 은총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노래는 늙지도 변하지도 않은 채 수많은 시간을 건너와 지금 여기 우리 동네, 우리집 거실에도 참 따스하게 내려와 있다. 창가의 화초들에도, 강아지 ‘요키’에게도, 그리고 고단한 내 어깨 위에도 맑고 환하게, 순하고 따스하게 내려앉아 있다.
유년의 가을엔 늘 뭔가가 널려 있었다. 마당엔 타작한 곡식들과 붉은 고추, 나박나박 썬 하얀 호박이, 장독대 옆에는 볏짚에 엮인 무청 다발이 꼬들꼬들 말라가고 있었다. 빨랫줄엔 빨래들이 마르고 대숲에선 깊게 들어찬 햇살에 사락사락 어둠이 말라 갔다. 습하고 눅눅한 것들에는 햇볕만이 유일한 처방인 듯 요리조리 되작되작 바지런히 말려졌다. 그리하여 향은 더 짙어지고 맛은 더욱 풍부해져 밥상 위의 별미가 될 수 있었으니, 그 알뜰하고 살뜰한 모습은 가을 하면 생각나는 가장 따스한 정경이다.
지금 저 속에는 햇볕도 바람도 옹골차게 스며들고 있을 것이며, 포르릉 참새, 푸드덕 날아온 까치, 지저귀는 새들의 소란도 고스란히 섞여들 것이다. 제 몸의 물기를 싹 다 날리고 새로 맞은 것들을 고이고이 모셔둘 것이다. 이윽고 다시 몸을 푸는 날이면 수줍고도 천연스럽게 그 귀환을 알릴 것이다. 그날은 모으고 풀어내는 것의 숭고한 미덕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름 없는 기부 천사의 선행처럼 뭉클한 감동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런 날이면 밥상의 풍경도 잔치처럼 향긋하고 은성할 것이다.
햇볕에 나앉아 있으니 나도 물기 여읜 고추처럼 투명해지는 것도 같고 오장육부까지 고슬고슬해지는 것도 같다. 옹졸했던 마음이 스르르 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정도면 됐지 무얼 더 바랄까 싶어지기도 한다. 더 갖지 못해 안달하는 삶이었다는 것도 새삼 후회된다. 햇볕 속에 있노라니 말랑말랑 노근노근 욕심조차 없어지는 듯하다.
견유학파(犬儒學派)로 불리는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말 그대로 ‘개 같은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개처럼 무욕(無慾)하고 자족(自足)하며 무치(無恥)한 삶을 추구했거니와 어떤 욕심도 내지 않고, 부와 명예와 권력 따위에는 관심도 없으며, 현재의 처지에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았다. 배부르면 따뜻한 곳을 찾아 잠자는 것을 낙으로 삼고,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개와 같은 삶이었다. 가진 것이라곤 남루한 옷과 지팡이밖에 없으며 나무통을 집으로 삼아 살아가는 ‘거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정복왕 알렉산더의 호의를 주저 없이 물리쳤을 정도로 당당하고 자유로운 삶이었다.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겠다는 최고의 권력자 앞에서 “그렇다면 햇볕이나 가리지 말아주시오”라고 태연하게 응수했다고 하니, 그 배포가 부러울 따름이다. 그에게 이 세상의 부와 명예와 권력은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것들은 한순간의 따사로운 햇볕보다 못한 것이었다.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하마터면 모든 것을 잃어버릴 뻔한 위험한 순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햇볕에 앉아 네 다리 쭉 뻗은 견공(犬公)의 잠꼬대와 함께 모처럼 ‘비옥한’ 시간을 즐기는 중이다. 디오게네스에 비할 바는 전혀 아니지만, 이 따스하고 하염없는 것의 은총을 조금은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