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세상의 더러움을 씻어 주는 사람-정소영 동화 작가
2022년 10월 12일(수) 01:30 가가
일본의 그림책 작가 사토 와키코의 책 ‘도깨비를 빨아 버린 우리 엄마’라는 책에 나오는 엄마는 맥가이버 같은 엄마다.
간단한 줄거리를 말하면, 빨래하기를 좋아하는 엄마가 있었다. 이 엄마는 집안에 있는 빨래는 물론 고양이, 개, 닭, 소시지, 구두, 슬리퍼 등 닥치는 대로 모두 빨아 집게로 꽉 집어서 빨랫줄에 널었다. 어느 날, 천둥도깨비가 구름을 운전해서 엄마의 빨랫줄을 구경하러 왔다가 그만 빨랫줄에 걸리고 만다. 엄마는 이 도깨비까지 빨아서 빨랫줄에 널었다. 아이들은 바짝 마른 천둥도깨비의 얼굴을 예쁜 아이로 그려 주었다.
다음 날, 더러운 도깨비들이 몰려와 빨아 주고 씻겨 주고 예쁜 아이로 만들어 달라고 한다. 엄마는 힘차게 말했다. “좋아, 나에게 맡겨.”
나는 이 그림 동화책을 읽으며 나의 엄마를 생각했다.
나는 엄마를 기억할 때 ‘삐그덕’ 대문 열리는 소리를 듣곤 한다. 어린 시절 엄마는 가계에 보탬이 되려고 했는지 건어물 행상을 하였다. 며칠씩 먼 곳으로 장사를 갔다 돌아오셨다. 대문 ‘삐그덕’ 소리가 나면 엄마가 보퉁이를 이고 들어오셨다. 밤늦은 시간에 기차를 타고 오신 것이다. 대문이 열리는 소리, 유년의 그 소리는 기다림과 그리움과 사랑의 상징으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엄마는 우리에게 고향이며 뿌리 같은 존재다. 우리는 엄마를 생각하며 무의식적으로 삶의 근원을 찾는다.
‘도깨비를 빨아 버린 우리 엄마’ 그림책에 나오는 엄마와 나의 엄마가 같은 엄마로 쉽게 다가오는 것은 빨래가 주는 이미지 때문이다. 여기 나오는 엄마는 역동적이다. 만능 엔터테이너 같은 초능력을 가진 엄마로 보인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우리들의 엄마도 초능력자였다. 엄마는 무엇이든 해결해 주었다. 무엇이든 척척 빨아 빨랫줄에 너는 이 그림책 속의 엄마처럼 강인하고 부지런하고 무슨 일이든 해 냈다.
이 그림책 속에서 압권인 장면이 있다. 온갖 것을 다 빨아 널은 장면이다. 고양이, 개, 닭, 신발장의 슬리퍼, 구두, 우산, 게다가 더러운 도깨비들까지 빨아서 빨랫줄에 너는 엄마를 상상해 보라.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들을 빨아서 햇빛에 널어 말리는 엄마는 위대한 혁명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도깨비를 예쁜 도깨비로 변신시키기까지 한다. 생활을 디자인하는 예술가다.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적에 엄마는 신처럼 전지전능하고 거대하고 무슨 일이든 해내는 사람이었다.
그 모두가 엄마의 사랑이었음을 어른이 된 후에 알게 된다.
어머니의 사랑에는 이 그림책 속에 등장하는 엄마의 ‘빨래’가 상징하는 것처럼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힘이 있다. 작게는 가족, 크게는 세상의 온갖 더러움, 세상의 고통과 슬픔까지도 깨끗이 씻어서 털털 털어 햇빛에 말리는 힘이다.
우리는 그런 엄마의 힘으로 생존을 키웠다. 하나의 작은 생존이 큰 생존으로 하나가 되면서 ‘인류의 엄마’는 진실이 살아있는 세상, 따뜻한 세상, 함께 나누는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요즘은 빨래도 세탁기가 해주고 건조기가 빨랫줄 대역을 한다. 도깨비까지 빨아준 엄마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아파트에 있는 어린이 놀이터를 지나다 보면 아이들에게 그네를 태워 주고,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엄마들을 만난다. 어린이집 버스를 기다리며 우는 아이를 달래는 젊은 엄마도 본다. 내 나이로 보면 딸 같은 엄마들이다. 그들이 그들 나름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빨래하고 있다.
이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우리들의 엄마는 여전히 존재 할 것이다. 미래에는 세탁기보다 더 한 기계가 나와 빨래를 해 주겠지만 여전히 엄마는 세상의 더러움을 씻어 주는 사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으로 존재할 것이다.
엄마의 사랑은 생명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빨아 버린 우리들의 엄마는 미래에도 외칠 것이다.
“좋아, 나에게 맡겨.”
간단한 줄거리를 말하면, 빨래하기를 좋아하는 엄마가 있었다. 이 엄마는 집안에 있는 빨래는 물론 고양이, 개, 닭, 소시지, 구두, 슬리퍼 등 닥치는 대로 모두 빨아 집게로 꽉 집어서 빨랫줄에 널었다. 어느 날, 천둥도깨비가 구름을 운전해서 엄마의 빨랫줄을 구경하러 왔다가 그만 빨랫줄에 걸리고 만다. 엄마는 이 도깨비까지 빨아서 빨랫줄에 널었다. 아이들은 바짝 마른 천둥도깨비의 얼굴을 예쁜 아이로 그려 주었다.
나는 이 그림 동화책을 읽으며 나의 엄마를 생각했다.
‘도깨비를 빨아 버린 우리 엄마’ 그림책에 나오는 엄마와 나의 엄마가 같은 엄마로 쉽게 다가오는 것은 빨래가 주는 이미지 때문이다. 여기 나오는 엄마는 역동적이다. 만능 엔터테이너 같은 초능력을 가진 엄마로 보인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우리들의 엄마도 초능력자였다. 엄마는 무엇이든 해결해 주었다. 무엇이든 척척 빨아 빨랫줄에 너는 이 그림책 속의 엄마처럼 강인하고 부지런하고 무슨 일이든 해 냈다.
이 그림책 속에서 압권인 장면이 있다. 온갖 것을 다 빨아 널은 장면이다. 고양이, 개, 닭, 신발장의 슬리퍼, 구두, 우산, 게다가 더러운 도깨비들까지 빨아서 빨랫줄에 너는 엄마를 상상해 보라.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들을 빨아서 햇빛에 널어 말리는 엄마는 위대한 혁명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도깨비를 예쁜 도깨비로 변신시키기까지 한다. 생활을 디자인하는 예술가다.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적에 엄마는 신처럼 전지전능하고 거대하고 무슨 일이든 해내는 사람이었다.
그 모두가 엄마의 사랑이었음을 어른이 된 후에 알게 된다.
어머니의 사랑에는 이 그림책 속에 등장하는 엄마의 ‘빨래’가 상징하는 것처럼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힘이 있다. 작게는 가족, 크게는 세상의 온갖 더러움, 세상의 고통과 슬픔까지도 깨끗이 씻어서 털털 털어 햇빛에 말리는 힘이다.
우리는 그런 엄마의 힘으로 생존을 키웠다. 하나의 작은 생존이 큰 생존으로 하나가 되면서 ‘인류의 엄마’는 진실이 살아있는 세상, 따뜻한 세상, 함께 나누는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요즘은 빨래도 세탁기가 해주고 건조기가 빨랫줄 대역을 한다. 도깨비까지 빨아준 엄마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아파트에 있는 어린이 놀이터를 지나다 보면 아이들에게 그네를 태워 주고,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엄마들을 만난다. 어린이집 버스를 기다리며 우는 아이를 달래는 젊은 엄마도 본다. 내 나이로 보면 딸 같은 엄마들이다. 그들이 그들 나름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빨래하고 있다.
이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우리들의 엄마는 여전히 존재 할 것이다. 미래에는 세탁기보다 더 한 기계가 나와 빨래를 해 주겠지만 여전히 엄마는 세상의 더러움을 씻어 주는 사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으로 존재할 것이다.
엄마의 사랑은 생명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빨아 버린 우리들의 엄마는 미래에도 외칠 것이다.
“좋아, 나에게 맡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