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역사학자 시대의 개막- 강진갑 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장 전 경기대 교수
2022년 10월 11일(화) 01:00
“몇 번의 강의를 듣고 인터뷰 실전 연습을 한 후 우리는 세 명이 한 팀이 되어 한 어르신 부부의 생애와 40년간의 배 농사에 대해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22세에 만나 84세가 될 때까지 62년간 서로 배려하면서 응원하며 살아오신 두 분, 아름답게 빛나는 미소와 삶의 지혜는 닮고 싶을 만큼 제게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분들의 경험치를 지적 유산으로 남기는 작업이라니 생각할수록 보람이 느껴졌습니다.”(『평택을 기억하다, 기록하다 2』 중에서)

지역의 도서관에서 지역의 역사를 조사하여 기록할 기억 수집가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응모한 한 시민이 기억 수집가가 되는 과정을 쓴 글이다. 이 글에는 기억 수집가가 된 데 대한 자부심과 즐거움도 담겨 있다.

최근 지역의 도서관, 문화원에서 시민 대상으로 구술 조사와 글쓰기 교육을 시행하는 프로그램을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특징은 교육 수료자들에게 시민 대상으로 구술을 채록하게 하고, 채록한 내용을 책으로 묶어 낸다는 데 있다.

이 프로그램이 주목되는 것은 전문 연구 분야인 지역학 연구 조사 및 연구서 발간에 시민이 참여하는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참여한 시민이 시민 역사학자가 되어 지역사 연구의 새로운 중심이 되고 있다.

2019년 『파주에 살다, 기억하다』라는 제목의 책이 발간되었다. 경기도 파주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휴전선을 끼고 있는 지역이기에 2000년도 초까지 미군 부대가 주둔하였다. 미군이 주둔한 지역은 기지촌이 형성되었다. 주민들은 미군기지에 취직하거나, 미군기지와 미군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였다. 기지촌 여성은 한국 현대사의 아픈 손가락이다

파주 지역 기지촌 주민의 아픈 삶이 ‘파주에 살다, 기억하다’에 그대로 기술되어 있다. 이 책은 파주 중앙도서관이 2017년부터 2019년 사이에 지역 시민 채록단을 모집하고, 그들이 파주에 오래 거주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구술 채록하여, 시민의 생애사를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의 1부 목차가 ‘가슴에 묻고 눈에 새긴 나의 봉일촌’이다. 제목에서부터 지역민의 아픔이 배어있다. 목차 ‘하우스보이 두 번째 고향이야기’ ‘슬퍼서 사랑했던 폴라로이드 인생 샷’ ‘사단 앞 오 대째, 누구의 잘못도 아닌 세월’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지역 시민 채록단에 참여하여 시민 역사학자가 된 시민들이 주민의 기억 속에 깊숙이 숨겨져 있던 기억을 하나씩 되살려 지역의 역사를 복원한 것이다.

시민들이 스스로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특정 지역만의 일이 아니라 전국에서 펼쳐지고 있다. 역사는 사료에 대한 엄밀한 비판,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구술을 통해 재구성된 역사는 객관적 사실에 부합하는 역사인가? 주민의 기억은 정확할까? 기억에는 착오도 있고, 거짓 진술도 있다. 구술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역사, 특히 개인의 생애사는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구술만을 바탕으로 구성된 개인 생애사와 마을사는 객관적 사실에 일치하는 역사라기보다 그 개인이 기억하는 역사일 것이다. 따라서 구술 채록된 내용이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관련 연구와 문헌 자료와 비교하고, 사료 비판을 거칠 필요가 있다.

구술 자료가 이 같은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구술 자료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고 모든 사료가 지니는 속성이고 한계이다. 그러므로 시민이 주민의 기억을 채록하여 기술한 구술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문헌에 남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준다.

사족, 아직은 서투르지만 자기가 사는 지역의 역사를 진지하게 조사하고 기술하는 시민 역사학자의 역사서를 보고 있노라면, 아직도 20세기에 머물러 역사를 쓰는 일부 역사학자의 역사책보다는 역사적 진실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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