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 오상욱 국민연금 목포지사 과장
2022년 10월 10일(월) 22:00 가가
얼마 전 가까운 인척이 투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문병을 갔다. 묵향이 가득한 집안 분위기와 사뭇 다른 벽시계가 눈에 거슬렸다. 초침만 있을 뿐 정작 있어야 할 시침과 분침이 없다.
저놈이 몰골은 초라해도 자식보다 효자라며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는 듯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것이 회한의 시작일까 내게 채워진 지천명(地天命)의 완장 때문일까 죽음의 문턱에서까지 자식의 불효를 애써 감싸주려는 어르신의 내리사랑이 시리다.
자식이 부모를 폭행하고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비정의 시대에 우리는 ‘효’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을 말할 때 흔히 쓰이는 표현이다. 자식 사랑은 쉬워도 부모를 사랑하기 어렵다는 가르침이다.
세대 간 가치가 달라서 그런 것이라고 세상은 내게 받아들이라 한다. 부모는 세대 차이가 없고 가치가 다르지 않아서 절절히 내리사랑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세상이 우리를 속이는 듯하여 가슴이 아리다.
지구상의 모든 동물이 자식을 사랑하지만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사람이 유일한 듯싶다. 수많은 문학이 ‘치사랑’을 삶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향기로 미화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요즈음 젊은이들은 보은을 어버이날에 용돈이나 드리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듯하여 참으로 안타깝다. 이러한 상황을 예견하여 공자는 “집에서 기르는 말도 먹이기야 하지 않느냐. 그러니 공경하는 마음이 없다면 무엇으로 구별할 수 있겠더냐?”며 겉치레를 경계(警戒)했는지 모른다.
멀건 죽을 부모님 상에 올리더라도 공경하는 마음이 깃들어야 효가 되고 수백만 원으로 해외여행을 보내드려도 공경심이 없다면 효가 아니라는 가르침이다. 즉, 마음과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돈이나 선물로 도리를 다한다고 착각하지 말자.
부모와 자식은 하늘이 맺어 준 아주 특별한 인연이다. 여덟 섬 너 말의 젖을 먹여 나를 키우신 분이 아닌가? 강보에 싸여 있을 적에는 어머니가 내어주는 사랑을 아낌없이 받아 맑게 웃어 주고 아장아장 걸음마로 쪼르르 달려가 엄마 아빠 품에 안겨드리자. 고사리손으로 셈을 하고 연필을 들어 감사 글도 써 보자.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여 사랑스러운 반려자를 얻어 알콩달콩 행복한 가정을 꾸려 귀여운 손자의 방긋 웃는 모습을 보여 드리자. 늙은 부모님의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식 자랑거리를 부족함 없이 선물하자.
가족 공동체에서 익힌 사랑의 기술이 발효되어 세상에 펼쳐지면 그것이 곧 사람의 향기 효도가 아닐까 싶다.
누구나 한 번쯤 본 적이 있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의 속뜻을 음미해 보자. 사랑 되돌려 주기를 통해 형성된 가족 간의 화목이 일을 성취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가정에서 익힌 사랑 올리기는 가족을 미소 짓게 할 뿐만 아니라 직장과 사회공동체를 미소 짓게 하는 나눔의 씨앗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 소중한 가치 ‘효’, 이것이 세상과 이별 준비 중인 어르신이 내게 주신 마지막 선물이었다. 지금은 부모님이 계셔 사랑을 베풀어 주니 마냥 기쁘지만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진 해가 부모님의 현재가 아닌가?
어르신 인생도 비디오 되감기처럼 지나온 시간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록 전부를 되감지 못할지라도 어느 한 시절, 한순간만이라도 말이다.
불현듯 이청준의 소설 ‘눈길’이 스쳐 간다. 어머니에게 빚진 것이 없다며 반항하는 아들, 그 아들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는 죄책감에 당신의 소망을 끝까지 숨긴 채 아들과 슬픈 동행이 끝나고 혼자서 돌아오던 눈길…. 굽이굽이 외진 산길을 오목 디뎌 놓은 아들의 발자국만 밟고 돌아오면서 어머니는 혼잣말한다.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히 지내거라, 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고 복 받고 살아라” 눈물을 떨구고 차가운 눈길을 걸어오던 슬픈 운명의 어머니…,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온 우리 모두의 어머니 모습이 아닐까?
저놈이 몰골은 초라해도 자식보다 효자라며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는 듯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것이 회한의 시작일까 내게 채워진 지천명(地天命)의 완장 때문일까 죽음의 문턱에서까지 자식의 불효를 애써 감싸주려는 어르신의 내리사랑이 시리다.
세대 간 가치가 달라서 그런 것이라고 세상은 내게 받아들이라 한다. 부모는 세대 차이가 없고 가치가 다르지 않아서 절절히 내리사랑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세상이 우리를 속이는 듯하여 가슴이 아리다.
멀건 죽을 부모님 상에 올리더라도 공경하는 마음이 깃들어야 효가 되고 수백만 원으로 해외여행을 보내드려도 공경심이 없다면 효가 아니라는 가르침이다. 즉, 마음과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돈이나 선물로 도리를 다한다고 착각하지 말자.
부모와 자식은 하늘이 맺어 준 아주 특별한 인연이다. 여덟 섬 너 말의 젖을 먹여 나를 키우신 분이 아닌가? 강보에 싸여 있을 적에는 어머니가 내어주는 사랑을 아낌없이 받아 맑게 웃어 주고 아장아장 걸음마로 쪼르르 달려가 엄마 아빠 품에 안겨드리자. 고사리손으로 셈을 하고 연필을 들어 감사 글도 써 보자.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여 사랑스러운 반려자를 얻어 알콩달콩 행복한 가정을 꾸려 귀여운 손자의 방긋 웃는 모습을 보여 드리자. 늙은 부모님의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식 자랑거리를 부족함 없이 선물하자.
가족 공동체에서 익힌 사랑의 기술이 발효되어 세상에 펼쳐지면 그것이 곧 사람의 향기 효도가 아닐까 싶다.
누구나 한 번쯤 본 적이 있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의 속뜻을 음미해 보자. 사랑 되돌려 주기를 통해 형성된 가족 간의 화목이 일을 성취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가정에서 익힌 사랑 올리기는 가족을 미소 짓게 할 뿐만 아니라 직장과 사회공동체를 미소 짓게 하는 나눔의 씨앗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 소중한 가치 ‘효’, 이것이 세상과 이별 준비 중인 어르신이 내게 주신 마지막 선물이었다. 지금은 부모님이 계셔 사랑을 베풀어 주니 마냥 기쁘지만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진 해가 부모님의 현재가 아닌가?
어르신 인생도 비디오 되감기처럼 지나온 시간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록 전부를 되감지 못할지라도 어느 한 시절, 한순간만이라도 말이다.
불현듯 이청준의 소설 ‘눈길’이 스쳐 간다. 어머니에게 빚진 것이 없다며 반항하는 아들, 그 아들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는 죄책감에 당신의 소망을 끝까지 숨긴 채 아들과 슬픈 동행이 끝나고 혼자서 돌아오던 눈길…. 굽이굽이 외진 산길을 오목 디뎌 놓은 아들의 발자국만 밟고 돌아오면서 어머니는 혼잣말한다.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히 지내거라, 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고 복 받고 살아라” 눈물을 떨구고 차가운 눈길을 걸어오던 슬픈 운명의 어머니…,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온 우리 모두의 어머니 모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