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나지완의 꿈-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수필가
2022년 09월 25일(일) 23:00 가가
타이거즈 야구에는 스토리가 있다. 삶의 애환이 끈적끈적 묻어난다. 그래서 애잔하다. 눈썹 밑에는 때론 서글픈 눈물이, 때론 감동의 눈물이 딱지 져 있다. 그래서 타이거즈는 ‘너’가 아니었다. 늘 ‘우리’였고 결국 ‘나’였다.
모기업이 가난해서 선수를 팔아 팀을 운영할 때 우리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저 ‘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열차’를 목청껏 부를 뿐이었다. 아이러니하게 가장 증오한 5공화국 정권이 만든 프로야구에 가장 매료된 사람들이 우리였다. 우리는 모기업 해태가 위태롭다는 소식을 타이거즈라는 야구팀을 통해 알았고 팀이 해체될까 끊임없이 전전긍긍했다.
타이거즈에는 개성 강한 선수가 많았다. 한국시리즈에 오르면 매번 우승하였고 또 우승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타이거즈의 가을 야구는 재방송을 보는 것처럼 결과가 뻔해서 좀 싱거웠다. 우리를 위로라도 해주듯 경기마다 신출귀몰하게 펄펄 나는 영웅이 나타났고 선수 한 명 한 명이 그렇게 가을 드라마를 썼다. 그 팀이 타이거즈였다.
타이거즈의 최근 스토리를 장식한 선수는 나비, 나지완이다. 그가 은퇴한다니 괜히 미안하고 눈물샘이 그렁해진다. 왜 그를 보면 시름시름 아픈 걸까.
가난했지만 화려했던 해태는 20세기에 걱정했던 바대로 지고 말았다. 그리고 2001년 기아로 이름을 갈아탄 타이거즈는 가난에서는 벗어났을지 모르지만, 이번엔 승패에서 암흑기를 맞이한다. 2005년은 승률 0.392라는 팀 사상 최다 패로 야구팬들을 기아에 빠트렸다. 모두 영웅을 기다리는 그 깜깜한 시기에 혜성처럼 등장한 선수가 바로 나지완이었다. 2008년 입단한 그는 2009년 10월에 열린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패배 직전의 팀을 극적 홈런으로 우승으로 이끈다. 드라마보다 더 강렬했다.
나지완이 뛸 때 타이거즈는 겨울이었다. 좋은 투수는 많았지만, 독보적인 홈런 타자가 없었다. 그런데 그토록 갈망한 홈런 타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해태가 아닌 기아의 명실상부한 4번 타자였다. 나지완이 아닌 ‘나지왕’이라고 불린 그는 우리가 가장 사랑한 선수이자 신이었다. 그는 프로야구 선수 중에서 가장 무거운 배트, 호남 사람들의 열망을 한꺼번에 짊어지고 매 타석에 나선 선수였고, 1472경기마다 매 타석 홈런을 쳐야 하는 선수였다. 하지만 불과 221개 홈런밖에 치지 못한, 타이거즈 역사상 가장 많은 홈런을 친 형편없는 타자였던 셈이다. 그러기에 가장 실망할 수밖에 없는 선수였다
나지완은 열심히 뛰었다. 사구도 포볼도 가장 많았다. 이를 악물고 뛰어도 언제나 귀여운 순둥이였다. 그는 15년간 기아에서만 뛰었고 언제나 4번이었다. 하지만 우린 그가 포볼로 걸어서 나가도 불만이었고 안타를 쳐도 홈런이 아니라고 투덜댔다. 너무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게 우리 애정 표현법이었다.
많이 미안하다. ‘방망이는 못 치면 나만 죽는다. 하지만 실수 하나 하면 팀이 질 수 있다’ ‘열정은 스피드 건으로 찍히지 않는다’라는 말은 그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그가 2009년 보여준 경기는 지금까지 야구 중에 단연 최고의 경기였다. ‘팬들은 기록을 원하지 않는다. 감동을 원한다.’ 나지완은 그런 멋진 아름다운 선수였다.
그는 “그동안 팬들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며 최고의 팬들에게 받은 사랑을 마음속 깊이 새기며 살겠다”라고 은퇴 의사를 밝혔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이제 그는 우리 곁을 떠난다. 우리의 어리광에 그는 언제나 묵직한 홈런, 진솔한 삶으로 화답했다. 나지완의 야구 스토리는 여기까지다. 요기 베라의 말처럼 그의 삶은 몰라도 야구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그리고 화려했던 현역 시절보다 더 화려하게 빛나길 고대한다. 그의 꿈이 후반전에 더욱 빛나길 기대한다.
타이거즈에는 개성 강한 선수가 많았다. 한국시리즈에 오르면 매번 우승하였고 또 우승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타이거즈의 가을 야구는 재방송을 보는 것처럼 결과가 뻔해서 좀 싱거웠다. 우리를 위로라도 해주듯 경기마다 신출귀몰하게 펄펄 나는 영웅이 나타났고 선수 한 명 한 명이 그렇게 가을 드라마를 썼다. 그 팀이 타이거즈였다.
나지완이 뛸 때 타이거즈는 겨울이었다. 좋은 투수는 많았지만, 독보적인 홈런 타자가 없었다. 그런데 그토록 갈망한 홈런 타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해태가 아닌 기아의 명실상부한 4번 타자였다. 나지완이 아닌 ‘나지왕’이라고 불린 그는 우리가 가장 사랑한 선수이자 신이었다. 그는 프로야구 선수 중에서 가장 무거운 배트, 호남 사람들의 열망을 한꺼번에 짊어지고 매 타석에 나선 선수였고, 1472경기마다 매 타석 홈런을 쳐야 하는 선수였다. 하지만 불과 221개 홈런밖에 치지 못한, 타이거즈 역사상 가장 많은 홈런을 친 형편없는 타자였던 셈이다. 그러기에 가장 실망할 수밖에 없는 선수였다
나지완은 열심히 뛰었다. 사구도 포볼도 가장 많았다. 이를 악물고 뛰어도 언제나 귀여운 순둥이였다. 그는 15년간 기아에서만 뛰었고 언제나 4번이었다. 하지만 우린 그가 포볼로 걸어서 나가도 불만이었고 안타를 쳐도 홈런이 아니라고 투덜댔다. 너무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게 우리 애정 표현법이었다.
많이 미안하다. ‘방망이는 못 치면 나만 죽는다. 하지만 실수 하나 하면 팀이 질 수 있다’ ‘열정은 스피드 건으로 찍히지 않는다’라는 말은 그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그가 2009년 보여준 경기는 지금까지 야구 중에 단연 최고의 경기였다. ‘팬들은 기록을 원하지 않는다. 감동을 원한다.’ 나지완은 그런 멋진 아름다운 선수였다.
그는 “그동안 팬들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며 최고의 팬들에게 받은 사랑을 마음속 깊이 새기며 살겠다”라고 은퇴 의사를 밝혔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이제 그는 우리 곁을 떠난다. 우리의 어리광에 그는 언제나 묵직한 홈런, 진솔한 삶으로 화답했다. 나지완의 야구 스토리는 여기까지다. 요기 베라의 말처럼 그의 삶은 몰라도 야구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그리고 화려했던 현역 시절보다 더 화려하게 빛나길 고대한다. 그의 꿈이 후반전에 더욱 빛나길 기대한다.